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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천의 풍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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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목천의 흑성산 기슭이 하루아침에 명지가 되었다. 독립기념관건립지로 내정되고 나서다. 소재는 충남천원군목천면신계리.
5백여년 전 노사신이 편찬한「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이곳은 일찍부터 뼈대가 있는 고장이다.
고려 때의 이런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태조(877∼943년)가 후백제의 견훤을 몰아내고 국토를 통일한 뒤 유민들을 포섭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이 고장 사람들은 끝내 굴복 않고 버티었다. 태조는 그 분을 참지못해 짐승들의 성씨를 내려주었다고 한다. 우씨,마씨,상씨,돈씨,장씨. 후일 이들은「牛」를「于」로,「象」을「尙」으로,「豚」을「頓」으로,「獐」을「張」으로 고쳤다고 한다.
고장 이름도 백제 때는 대목 악군, 신라 때는 대록, 고려 때는 목주라고 했다. 어느 이름이나 나무가 들어있는 것을 보면 꽤나 산림이 울창했던가 보다.
「목천」은 조선 왕조 태종 13년에 고쳐진 이름이다.
주위의 산들도 즐비해 작성산 , 흑성산, 취암산 ,주성산, 성거산,길상산 등이있다. 취암산 서쪽엔 용혈도 있다. 산들 사이로는 산방천이 이리저리 비켜 흐른다. 고을북쪽 산방동에서 흘러나와 청주진목탄까지 뻗친다.
벌써 풍수지리설도 분분하다.「오룡쟁주형」이란 표현은 크고 작은 산들이 올망졸망한 모양을 두고 하는 말 같다.
흑성산은 바로 차령산맥이 잠시 멈칫하는 자리에 5백l9m 높이로 솟아 그 부근 어디에서나 우러러 보인다. 그 산세가 천하통일의 기상을 닮아 예부터 이 고장을 다스리면 천하가 통일된다는 속설도 있다.
조선 왕조 때 어사 박문수의 묘도 이곳에 쓰려했지만 터가 너무 좋아 후세에 오히려 옮길 염려가 있어 이웃의 북면을 택했다는 얘기도 있다.
권진 (1572∼1624년) 이란 시객은 이 고장을 기리는 시까지 남겼다.
-나그네길/봄바람에 말발굽 더디니/이 중에 산수가 기리한 것 어여뻐라/나무그늘 땅에 가득하고/뜰은 고요한데/달이 이화 위에 솟으니 절로 시가 되네.
흑성산 기슭으로는 산성이 둘러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둘레가2천2백90척(6·67㎞),높이가6척(l·80m).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왕건)가 3천 병사를 이끌고 후백제의 신검과 싸울 때 머무른 일이 있었다. 주성산은 한말 동학군이 북진하다가 패한 곳이기도 하다.
풍수탓인지역사상많은인물들이여기서태어났다.목천,그바닥은 아니지만 멀고 가까운 이웃에서 유관순 열사, 이충무공, 윤봉길 의사 등이 났다. 임신왜란 때 진주성에서 왜적을 물리친 김시민 장군의 출생지도 이웃한 동면이다. 서리의 이동령 장군(임정 초대 주석), 동리의 이범석 장군도 항일투사들이다.
심상찮은 풍수와 연고는 오늘우리에게 독립기념관의 모습으로 역사를 교훈 하려고 한다. 모처럼의 역사인데「작품」을 만드는 마음의대설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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