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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한·일 협상 제대로 봤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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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세간에 의혹과 억측이 난무했던 한.일회담 관련 한국 정부 외교문서가 한 장도 빠짐없이 그 전모를 드러냈다. 한.일회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본조건이 비로소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한.일 외교문서 공개심사단의 민간위원 자격으로 3만5000여 장에 이르는 외교문서의 공개 검토작업에 참여했던 필자는 한.일회담을 '대일 굴욕 협상' '매국외교'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오히려 필자는 악조건과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난적 일본을 상대로 당시의 박정희 정부가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결과로 최선은 아니라도 차선의 결실은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한.일회담에 대한 균형 잡힌 해석과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 전제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한.일회담의 출발점은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이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정부는 이 강화조약에서 전승국의 지위를 획득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펼쳤지만 최종적으로는 좌절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본에 막대한 배상.보상을 요구하려던 애초의 계획은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배상권리를 향유하는 제14조국에서 탈락함으로써 한.일 간 전후 처리는 제4조에서 규정한 대로 재산청구권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점은 한.일회담 내내 대일 협상력을 짓누르는 제약 변수로 작용했다.

둘째, 당시 한.일의 국력차를 고려해야 한다. 외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일 수밖에 없다. 경제력으로 보면 1960년대 중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 되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고 일본은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있었다. 또한 한국은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수립된 허약한 신생 국가에 불과했으나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 이래 탄탄하게 정비된 막강한 관료조직을 지닌 강대국이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철저한 법률론과 증거론을 내세워 한국의 과거사 청산 요구를 철저하게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한국 정부는 14년간 일본과 '외교전쟁'을 벌인 것이다. 박 정부는 대일협상 타결을 통해 식민지 과거사 청산과 개발자금의 획득, 그리고 한.미.일의 결속을 통한 안전보장의 확보를 추구하려 했다. 박 정부는 이 세 가지 목표 중 경제적 이익의 확보와 안보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빈곤과 안보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일본과의 국교수립을 통해 개발자금을 도입하고 미국으로부터 안보공약을 공고히 하는 것이 우선적 국익이라고 박 정부는 판단했던 것이다. 박 정부의 이러한 전략적 선택이 이후 한국의 고도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은 1950년대 배상자금을 성공적인 경제개발로 연결하지 못한 동남아의 국가들과 비교해 볼 때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경제와 안보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과거사 청산 과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된 점은 한.일회담의 최대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일제하 강제연행 피해자, 종군위안부의 보상 문제 등 미해결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한.일관계를 짓누르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위를 고려할 때, 지금이라도 일제하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가 국내조치로 검토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과거사 청산 문제는 당시의 한국 정부 못지않게 일본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일본 정부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실정 국제법이나 형식논리에만 집착하지 말고 종군 위안부 등 미해결 과거사 현안의 해결에 적극 나섬으로써 한국과의 역사적 화해에 동참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