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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진보당 사건(41)|정부 방해 속 민주당의 지지 없이도|죽산, 2백l6만 표를 얻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민주당과 진보당의 후보 단일화험상은 해공의 서거로 국면이 바뀌었다. 이젠 진보당의 부통령 후보 사퇴로 민주·진보 양당의 연합전선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진보당은 연합전선을 노려 재빨리 박기출 부통령 후보를 사퇴시키고 민주당의 장면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연합은 실현되지 않았다. 민주당의 김준연씨는 조봉암 후보의 정치노선은 믿을 수가 없다는 이유로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를 지지한다고 성명 했다. 이 성명은 민주당 안에서조차 비판을 받았다.

<민주당, 이 박사 지지>
그러나 민주당의 공식태도도 결국엔 금씨 성명과 그 방향을 같이했다. 민주당은 특별성명을 통해『남은 두 사람의 대통령후보는 그 행방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부득이 정권교체를 단념하고 부통령 선거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대통령 선거 투표는 신익희 후보에게 추모투표를 던져 달라고 했지만 정권교체를 단념한다는 귀 절을 성명에 포함시킴으로써 조봉암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민주당의 입장을 명백히 했다.
그 동안의 선거 전에서 야당 붐은 민주당에 쏠린 듯 했고 진보당 후보는 제3그룹으로 뒤 처져 있는 듯 했다. 민주당이 연합전선을 거부함에 따라 진보당은 여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조봉암 후보는 야당의 단일 대통령 후보라는 고지에 올라서 있었다.
진보당은 선거 전 마지막 9일 동안 거의 선전활동을 하지 못했다. 조 후보는 유세를 중단했다. 그 대신 중앙의 간부진이 각도에 유세 반을 편성, 마지막 유세와 선전 유인물 배포를 하도록 했지만 이들 모두가 선거방해로 활동을 하지 못했다.
충남반의 박준길. 강원반의 이명하씨 등은 현지에 내려간 직후 테러를 당하고 유인물을 뺏긴 채 되돌아왔다고 했고 경남반의 전세룡씨는 의령에서 경찰서장실로 연행돼 경고를 받고 쫓겨났다고 했다.
그 해의 경·부통령선거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선거폭력으로 얼룩졌다.
이윽고 투표일인 5월15일-. 그 전야까지의 소란에 비해서는 조용하고 질서 있는 투표였다.
개표결과는 이승만 5백4만여 표, 조봉암 2백16만여 표, 신익희 후보의 추모 투표가 대부분인 무효 1백85만여 표.
이 대통령은 조 후보보다 2백80만 표를 앞서는 압도적 승리를 했다. 그러나 부통령선거에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가 20만 표 차로 장면 후보에게 패배했다.

<장면, 20만 표 차 당선>
자유당은 정권을 유지했지만 승리자가 되지 못했다. 부통령 선거의 승리는 민주당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진보당의 조 후보는 패배했지만 4년 전의 76만 표를 3배 가까이 늘려는 현저한 성정을 보였다는 데서 당초의 기대는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개표의 공식발표는 조각됐으며 조 후보는 공식발표보다 훨씬 더 많은 표를 받았다는데 있었다. 대통령 선거 개표 록의 기록은 이같은 개표 의혹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조 후보는 대구시내의 3개 개표구에서 10여만 표를 얻어 이 후보의 3만8천 표를 압도했다. 이밖에도 전북의 전주 정읍, 전남의 목포, 경북의 김천 경주 달성 영천 경산 칠곡, 경남의 진주 충무 진해 진양 창령 양산 고성 등지에서 이 박사를 2배 이상 눌러 이겼다. 또 충남의 공주 대전, 전북의 완주, 전남의 광주, 경북의 고령, 경남의 마산 등지에선 이 박사와 엇비슷한 득표를 했다.
그러나 이 밖의 지역은 한결같이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특히 승리했거나 엇비슷하게 득표한 지역의 바로 이웃에서 2배 이상의 스코어로 패배했으며 강원도의 평창 정선 홍천 등지에선 이박사의 4만여 표에 비해 조 후보는 1백 표 선의득표에 그치는 일방적 패배였다. 이같은 개표결과는 표의 흐름을 읽어 낼 수 없는 엄청난 불균형이었다. 선거에 있어 이같은 표의 흐름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4·19이후 자유당 간부들의 상당수가 이때의 선거에서도 개표부정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개표가 시작되었을 때 예상 밖의 조봉암 표에 놀랐다. 이래서 민주당과 협상했다. 부통령 개표는 공정하게 할 테니 대통령선거 개표는 종사원에게 맡기라는 것. 이리하여 건국의대부분의 지역에서 민주당 측 참관인들은 대통령선거 개표를 방관하거나 외면했다. 이 때문에 투표함 수송이 손쉬워 개표가 일찍 시작된 중소도시에선 조봉암 표가 살았지만 그 밖의 지역에선 크고 각은 차이는 있지만 부정개표가 행해졌다.
지역에 따라선 너무 심하게 이 박사 표를 늘려 강원도 정선의 2만5천대 34표라는 심한 불균형을 드러냈다』는 것이 그 진상.
박문철씨(당시 경남 도당 선전부장·효광 상사 대표)의 증언. 진보당은 거의 참관인을 들여보내지 못했다. 나는 용케 부산중구 개표참관을 했다. 내가 계산한 것은 죽산이 3만여 표, 이 박사가 1만 표 선이었다. 그런데 선관위는 발표를 하지 않다가 나를 경찰에 연행한 뒤에야 발표했는데 죽산 표를 이 박사 표로, 이 박사 표를 죽산 표로 바꿔 발표했다.
어쨌든 민주당은 진보당의 표를 지켜 주지 않았다. 민주당과의 연합전선 실패는 개표참관에서 진보당을 무력하게 만든 셈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개표 부정의 규모는 알 수 없다. 개표가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해도 조 후보가 이 대통령을 눌러 정권을 교체할 수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조봉암의 득표가 공식 발표된 수보다 훨씬 웃돈다는 것만은 거의 명백하다.
죽산에게 쏠린 표, 그것은 거듭된 행정의 실패와 장기집권 및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에 대한 국민의 강한 거부의 표시로서 이승만 통치의 한계를 뚜렷이 밝혀 주었다. 따라서 조봉암에 쓸린 표는 조봉암에 대한 지지이기보다 이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으로 읽어야 했다.
그렇기는 해도 조봉암의 예상외의 진출은 보수 진영을 놀라게 했다. 동시에 조봉암에겐 제3당의 영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히는 결과가 됐다.
진보당의 창당과정에서 당수는 서상일 선이 원로 층의 뜻이었다. 특히 지명전에서 서 조가 아닌 서-조가 아닌 조-서 러닝메이트가 되면서 당수 후보의 분리 원칙이 거론되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의 결과를 지켜본 진보당의 조직들은 조봉암 당수라는 방향을 더욱 뚜렷이 굳히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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