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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8)제79화 육사졸업생들(21)|장창국|국내 정진군 편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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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는 가정법을 쓰지 말라는 말이 있다.『만약 이랬더라면…』하는 식의 사고는 역사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복군 얘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역사의 논리에는 모순되겠지만 가정법 적 사고를 떨쳐 버릴 수가 없게 된다.
2차 대전 때 일본의 항복이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미국이 원폭만 사용치 않았더라면, 일본의 마지막 어전전략회의에서 강경파가 이겼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나라는 미-소 양국 군이 아니라 광복군에 의해 해방이 이루어지고 불만을 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수세로 물리고 있던 43년 우리나라와 미국사이엔 한반도에서의 군사작전에 관한 비밀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측 대표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태근 선생의 장남이며 안춘성 장군의 6촌인 안우성, 작가 출신인 박영만, 그리고 송면수·진춘호·안병무 선생 등 이 있다.
이들은 개인자격으로 주중 미국 대사관 안에 마련된 코리언 그룹이라는 밀실에서 작전계획안과 건의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 극비문서는 주중 미군사령관「웨드마이어」중장에게 제출되고 긍정적인 반응도 얻게 되어 미 군사 심리작전 처「버드」대령과 실무접촉이 시작됐다.
접촉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미군 측에서 먼저 우리 임정에 대해 교섭을 제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즉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의 아들로 개성에서 태어난「위임즈」대위가 임정 선전부장 엄항섭 선생과 재경부장 조완구 선생에게 말을 꺼낸 것이다. 광복군에게 기술·훈련·물자·장비 등 모든 지원을 제공할 것이니 합동작전으로 한반도에 진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정으로서는 그같이 중요한 문제를 중국 정부의 사전 양해 없이 미국과 단독 협의, 결정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당시 광복군 지휘권은 장개석 총통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미 실무자들은 광복군 총사령부를 거쳐 이범석 제2지대 장에게 이 계획을 제시했다. 이 장군은 즉석에서 OK하고는 미군 사령부 측과 구체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중국의 특수 정보 수사기관인 중국 군 조사통계국장 재원대장이 이를 알고 이범석 장군을 호출하여 즉시 손을 떼라고 협박했다. 이 장군은 중국 군이 광복군지원에 소극적이라고 반박하면서 중국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김학규 제3지대장의 의사도 타진했다. 그도 즉석에서 OK했다. 제3지대에서는 이미 연합군 연락장교 김우전 선생이 미국 CIA의 전신인 OSS(전략정보 처)와 극비리에 접촉, 한반도 정진작전에 대비하여 한-미 합동 특수훈련을 추진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학규 대대장은 김원봉 제1지대 장(해임되기 전)은 공산주의자이므로 배제돼야 한다고 주장, 제1지대는 국내 정진군 편성에서 제외됐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임정도 이를 기정사질로 받아들여 45년 5월부터는 미군장교 지도아래 제2, 제3지대 요원들에게 마지막 특수훈련이 강행됐다. 공중낙하·정보수집·시설파괴·무선통신·게릴라 조직 등에 관한 훈련이었다.
45년 7월에는 마지막 리허설인 한미 합동 훈련을 마치고 부대편성에 들어가 이범석 장군이 국내정진 군 총사령관에 임명됐다.
제2지대가 1차로 8월13일 국내 3개 지구에 투입키로 됐다. 제1지구(경기·평안·황해)대장은 황해도 출신으로 낙양 군관학교 재학 중 성적이 우수하여 남경의 중앙군관학교(황포 군관학교의 후신)로 전학해 제10기로 졸업한 안춘성 장군, 제2지구(전라·충청)대장은 동기생인 노태준 선생, 제3지구(경상·강원·함경)대장은 노복선 선생이 맡게 됐다. 김준엽(고대총장), 장준하 선생 등 많은 학병출신들도 정진 군에 편성돼 있었다.
제3지대는 제2차로 8월23일 국내 13개 도에 투입될 계획이었다. 병력을 수송할 미군 수송기와 잠수함도 대기 태세에 있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 작전에 상응하여 이들은 조선 안에 있는 일본군의 병참·통신시설을 폭파하고 게릴라를 조직하여 일본군을 토벌, 궁극적으로는 조국 광복을 우리 힘으로 달성해 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미군당국은 기상관계라는 이유로 D데이를 15일로 연기한다고 통고해 왔다.
김구 주석은 정진부대의 출격을 격려·환송키 위해 13일 제2지대가 있는 서안으로 가서 예정된 행사를 마치고 서안성의 축 소주 주석(성장)집에서 베풀어진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이 한참 고조됐을 때 중경으로부터 황 주석에게 한 통의 전보가 날아 들어왔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
축 주석이 외치자 거기에 참석했던 미-중 인사들은 기뻐 날뛰면서 연거푸 축배를 들고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은 통탄을 금치 못했다. 조국정진·자력광복의 숙원이 실현 일보 전에 물거품이 돼 버린 것이다.
그 한 통의 전보 이후 광복군의 운명과 우리나라의 방향은 예상 밖의 코스를 줄달음치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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