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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터회고록 국내중점연재 「신의를 지키며」…<29>인권외교(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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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 새로운 세계는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요구하고 있다. 그 정책은 미국의 가치를 일관성 있게 추구하면서 밝은 장래를 약속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노터데임 대학에서의 외교문제에 관한 연설. 1977년 5월 22일>
권리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사람들은 남들이 받고있는 박해를 모르는체 하기 일쑤다.
나는 인종차별이 합법화되어 있던 사우드조지아 주에서 자라는 동안 나의 형들이나 마찬가지로 흑인들의 처지에 대해 조금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았었다. 「흑백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하다」는 연방 대법원의 판례만으로 충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흑인학생들은 걸어서 등교하고 나는 백인 학생들과 더불어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니면서도 흑백사이의 평등이 부족하지 않나 하는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위대하고 자유가 넘치는 우리의 미국에서 정의실현의 책임을 지고있는 교육자들이나 법률가·판사·주지사, 그리고 워싱턴에서 미국정부를 이끌고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믿기 어렵겠지만 흑인 어린이들이 아직도 그들만의 분리된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11년간의 해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큰아들을 내가 다녔던 학교에 등록시키고 섬터군 교육위원회의 위원이 되고 나서였다. 그리고 이런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은 더 많은 세월이 지나서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공명정대하고 친절하며 인정이 많다고 칭송 받아 온 인사들 가운데서도 인종적 편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인종문제에 대한 법적 논쟁이 일고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것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다른 모든 면에선 공명정대하고 친절하고 인정이 많으면서도 인종차별만은 하느님의 뜻이라며 이를 입증하는 성경 귀절을 줄줄이 외곤 했다.
조지아주 강원의원과 주지사로서의 내 임기가 끝났을 때 나는 내 지역에 살고있는 몇 분의 훌륭한 민권운동지도자들로부터 신임과 정치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 민권운동이 남부지역에서 이룩한 정치·사회적 변화는 도덕적 원칙들이 어떻게 우리사회구조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하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우리는 대의관계에서 여러차례 이와 동일한 교훈을 배워왔다.
도덕률과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공약이 외교정책에서 명백히 강조되었을 때 미국은 가장 강하고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존슨」대통령시절, 미국은 인종차별을 효과적으로 줄여 경제·사회적 도약의 기틀을 마련한 위대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최근 사에는 「트루먼」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인권옹호자였다. 유엔창설을 적극적으로 돕고 거대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신속히 인정한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는 미국의 영향력을 유감없이 과시한 것이었다.
2차대전 후 승전국으로서 그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미국은 패망한 일본과 독일을 속국으로 삼거나 가혹한 형벌을 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과거 군국주의국가였던 이들 두 나라에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입헌정부가 들어서도록 도왔으며 이것이 두 나라의 국민과 세계평화에 큰 이익을 가져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트루먼」대통령 이후 그러한 외교정책은 유감스럽게도 지속되지 못한 적이 많았다. 우리는 「제퍼슨」이나 「월슨」의 이상주의를 미국의 개성으로 내세우지 않은 적이 많았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전체주의자들이 던져준 이데올로기의 위협에 대처하고 미국인의 사기를 북돋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를 잃었다. 미소간의 경쟁을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우리는 외국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반공노선을 지지하느냐는 데만 최우선의 관심을 두었다. 이 때문에 우익전제자들과 군사독재자들은 그들의 압제행위에 대한 어떠한 비난으로부터도 쉽게 벗어날 수가 있었다.
미국은 그들이 쓰러지고 보다 자유스러운 통치를 할 다른 세력이 들어설 경우 이들이 반미노선을 형성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를 견제해왔던 것이다. 미국정부는 자유와 민주적 원칙을 촉진시키는 대신 악과의 투쟁에 있어 상대방과 똑같은 원칙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을 믿고있는 것 같았다.
74년 12월 나는 대통령출마를 발표하면서 하나의 꿈을 피력했다. 그것은 미국이 기본인권과 자유에 대한 뚜렷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과 현실, 도덕과 권력사이에서 우리가 치러야할 갈등과 논쟁들을 폭넓게 받아들일 각오가 돼있었다. 나에게 있어서 미국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외교문제에 대한 하나의 현실적 접근원칙이었고 미국의 힘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거였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세계의 몇몇 보수적 정권을 지지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에선 인권에 대한 박해를 숨기기란 불가능했다. 세계의 비난과 미국의 영향력은 공산국가들보다는 그런 나라들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나는 그러한 나라들에서의 인권신장과 미국의 지원을 연결시키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억압적인 정책을 바꾸도록 권유함으로써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아울러 박해와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종종 분출되는 혁명세력을 저지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그래서 우익전체주의정권이 좌익에 의해 무너지는 일없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는 몇몇 개발도상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었다.
나는 세상은 몇 가지 단순한 원칙만을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도 알고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구상의 모든 나라 지도자들이 『내 국민과 바깥세계가 내 나라의 인권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자문해보기를 원했다.
76년 8월 나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수락연설에서 미국은 기본적인 도덕적·철학적 원칙들-지혜와 용기 있는 비범한 행동, 인류의 창조적 상상력을 사로잡는 혁명적인 발전-에 헌신해온 최초의 국가였음을 지적했다. 우리가 세계의 관심을 다시 한번 집중시킨 시간이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앞으로 인권신장의 물결이 몰려올 것을 기대하고 믿었다.
인권외교가 소련을 비롯한 전체주의정부, 안정된 정권을 세우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신생국가들, 그리고 미국의 오래된 몇몇 서방동맹국과의 관계를 해칠 수도 있다는 것이 처음부터 드러났으며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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