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리울 때 가고 싶은 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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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호 28면

왼쪽 아래부터 시계 방향으로 가지 볶음밥, 유자삼치조림, 배추탕. 모두 편안하지만 깊이 있는 맛이 난다.

식당을 돌아다니다 보면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고 광고하는 곳들이 있다. 이런 곳을 만나면 우선 반가운 마음부터 든다. 더욱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어서다. 뭔가 자신만의 철학과 소신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조미료를 쓰는 것이 좋은가 좋지 않은가 와는 상관없이, 쉬운 길을 갈 수 있는데도 어려운 길을 택해서 묵묵히 노력하는 분들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든 기분 좋은 일이다.

주영욱의 이야기가 있는 맛집 <49> 청담동 범스

그런데 음식 맛이 없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음식은 자고로 약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단순한 사람에게는 맛이 아주 중요하다. 아무리 조미료를 넣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맛이 없다면 매력도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대신에 맛이 없는 음식과 조미료를 넣었지만 맛이 있는 음식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후자를 택한다.

나는 원래 조미료 사용 유무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적응력 높은 위장과 ‘저렴한’ 입맛을 가진 덕분이기도 하지만,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발표한 결과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 당국이 화학 조미료에 대해 최근까지 일관되게 발표한 공식 의견은 건강에 무해하다는 것이다. 뭐든 지나치게 사용하면 문제가 되고 조미료도 그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에게는 ‘음식도 좋고 맛도 훌륭한데 알고 보니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정도는 되어야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

최근에 알게 된 청담동의 ‘범스(BUMS)’라는 식당은 바로 그런 곳 중 하나다. ‘밖에서 먹는 편안한 집밥’이라는 컨셉트로 운영하는 깔끔한 한식집이다. 이곳의 메뉴들은 모두 집에서 한 번은 먹었던 것 같은 음식이다. ‘간장 비빔밥’은 어렸을 때 반찬거리가 별로 없으면 어머니가 밥에 김 가루와 달걀을 넣고 간장과 참기름 몇 방울로 쓱쓱 비벼 주셨던 것과 똑같다. 보기만 해도 옛 추억이 되살아나며 침부터 넘어간다. 술 마신 다음날이면 어머니가 속 풀이 하라고 집에 있던 배추를 뚝뚝 잘라 끓여 주셨던 ‘배추탕’도 있다. 모두 참 편하고 쉽게 만들어 먹던 음식들이어서 일반 식당들에서는 상품화를 하지 않았던 것들인데 이렇게 ‘집밥’이라는 컨셉트로 모아놓으니 오히려 정감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음식들이 됐다.

이곳은 조준범(36)·재범(34)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각자 전공을 살려 직장 생활을 하던 형제가 자신들만의 사업을 하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2010년에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당시에 이탈리안 음식점을 하고 계시기도 했고 솜씨가 좋으셔서 음식을 담당했고 형제는 경영을 맡았다. 메뉴는 함께 의논해 가면서 만들었다. 어머니의 손맛에 유학까지 한 젊고 세련된 감각이 더해지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곳의 메뉴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맛은 간단치 않다. 나름 깊이가 있고 맛이 있다. 일단,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저런 다양한 노력을 통해 음식들의 맛을 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소금은 ‘바다의 인삼’이라 불리는 함초 가루를 넣은 소금을 사용하고, 고추장도 매실 원액으로 담근 것을 사용한다. 간장도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과일을 넣어서 끓인 맛 간장을 사용한다. 이런 섬세한 노력들이 모두 더해지면서 특별할 것이 없는 재료로 만든 ‘집밥’들을 입에 착 달라붙는 별미로 만들어준다.

청담동이 어떤 곳인가? 화려한 명품 매장들이 즐비하고 방금 화보집에서 나온 듯한 세련된 ‘패션 피플’들이 ‘시크하게’ 활보하는 곳이다. 실력 있는 셰프들이 하는 최고급 음식점들이 많아서 웬만한 곳들은 명함도 내밀기 어렵다. 이런 동네에서 ‘간장 비빔밥’처럼 꾸미지 않은 맨 얼굴을 한 소박한 메뉴라니 왠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이다.

그런데 의외로 돋보였다. 항상 멋있는 척하고 폼만 잡으며 살수만은 없다. 가끔은 긴장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쉴 때도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쉬어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다. 조미료처럼 단시간에 쉽게 맛을 내는 화려한 생활과 인스턴트 인간 관계에 질린 사람들에게 소박하고 깊이 있는 것들이 아직 곁에 있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만 같다. ‘집밥’의 힘이다.

▶범스(BUMS):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88-8. 전화 02-3447-0888. 일요일에는 쉰다. 강남권에는 배달 전문 업체를 이용해서 배달도 해 준다. 간장 비빔밥 9000원, 가지 볶음밥 9000원, 배추탕 9000원, 유자삼치조림 2만4000원

주영욱 음식·사진·여행을 좋아하는 문화 유목민. 마음이 담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경영학 박사. 베스트레블 대표. yeongjyw@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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