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시 - 문인수 '꼭지'
평범한 일상을 제 것으로
무겁지 않고 편안한 느낌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라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생(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현대문학 2004년 7월 발표)

◇약력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8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늪이 늪에 젖듯이』(86년) 『세상 모든 집으로 간다』(90년) 『뿔』(92년) 『홰치는 산』(99년) 『동강의 높은 새』(2000년) ▶김달진문학상(2000년) ▶미당문학상 후보작 ‘꼭지’ 외 26편

시를 보자. 독거노인 할머니가 꼬불꼬불 골목길 올라간다. 달팽이처럼 꼬부라진 꼬부랑 할머니, 힘에 겨워 걷다 쉬다,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올라간다. 동사무소에 가야 한다. 거기 가야 밥 한 술 기대할 수 있다. 고픈 배 접어감추며 동사무소로 고개 오르는 길은 옛날 젖배 곯아 세상 노랗게 보이던 보릿고개 견디던 때와 다르지 않다.

시에서 '꼭지'는 할머니 이름이다. 아직도 우리네 할머니 중엔 '꼭지'란 이름이 흔하다. 딸을 내리 낳은 집안일수록 흔하다. 꼭지 따듯 그렇게 '딸년'을 끊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요즘 잣대로 너무 뭐라고는 하지 말자. 옛날 농경사회에서 자식은 대를 잇는 존재이기도 했지만 먹거리 생산해야 할 노동력의 의미가 더 절실했으니까.

올 환갑된 시인 문인수의 시다. 속내를 풀어냈을 때 시는 잔잔하고 아련하다. 하지만 소리내 읽으면 탱탱하고 생생한 맛이 살아난다. 시의 안쪽은 곰삭았어도 바깥은 젊다. 그건 시인이 '젊기'때문이다. 시인은 눙을 곧잘 치는데, 그 눙이라는 게 코미디보다는 개그에 가깝다. 질질 끌어 질척대지 않고 물방울처럼 톡톡 튄다. 시인과 대화하다 싱싱한 감각에 놀랐던 적 여러 번이다.

예심 위원들은 문 시인의 이러한 점을 높이 샀다. '평범한 일상에서 너무 깊은 무게를 주지도 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읽을 때 편안한 느낌이 들게 하는 시법을 터득한 시인이다(박수연).'

시인은 등단이 늦다. 마흔 턱을 넘긴 뒤에야 문단에 발을 들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거 원, '소설 한 권'이다.

"어릴 때부터 문학이 전부였다. 그러나 군 제대 뒤 남에게 내 시를 보이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때 나에게 시는 너무 아득하고 비현실적인 세계였다. 그 뒤로도 시를 썼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 난 '골방문학'을 했다. 골방에서 혼자 쓰고 혼자 읽는 문학. 마흔을 넘기고서야 아무런 지향도 없고, 영혼을 소진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삶에 회의가 들었다. 그때 비로소 용기를 얻고 세상에 나왔다."

오래 묵은 장(醬)일수록 달짝지근하고, 오래 삭힌 젓갈일수록 고소한 법이다. 시인 문인수를 읽고난 소감이다.

손민호 기자

소설 - 성석제 '잃어버린 인간'
짐짓 심각한 역사적 소재
특유의 익살?재치로 요리

◇작품 소개
재당숙모의 부고를 받은 나. 고향으로 문상을 간다. 하지만 재당숙모에 관한 기억은 많지 않다. 고인은 재당숙 이한봉씨의 부인이고, 쌍둥이 형제를 뒀다는 사실 빼고는 가물가물하다. 상가에서 문중 어른들의 증언으로 ‘잃어버린 인간’ 이한봉의 삶을 하나씩 듣는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에 휘말려 국군에게 총살당할 뻔했다가 극적으로 살아났고, 이후 살아도 살아 있지 않은 인간으로 살다 갔다.(창작과비평 2004년 가을호 발표)

◇약력
▶1960년 경북 상주 출생 ▶8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소설집『그곳에 어처구니들이 산다』(94년) 『새가 되었네』(96년)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년)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2005년) 등 다수 ▶한국일보문학상(97년), 동서문학상(2000년), 이효석문학상(2001년), 동인문학상(2002년), 현대문학상(2003년), 오영수문학상(2005년)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잃어버린 인간’

약간의 산수가 필요하겠다. 재당숙모면 재당숙의 부인이다. 부부는 무촌이니, 여기선 산수가 필요없다. 재당숙은 아버지의 6촌 형제를 일컫는 말이다. 엄격히 말한다면 재종속이라 불러야 옳다. 하지만 4촌 바깥의 아저씨면 당숙으로 통칭하는 경우를 예서도 따른다. 나와 아버지는 1촌 사이니, 부고가 전해진 재당숙모는 촌수로 7촌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십촌을 넘어가지는 않았다.

소위 '성석제 식'으로 시작해봤다. 그냥 친척 어른이라고 짧게 부르는 법이 없다. 판소리 사설 늘어놓듯 별것도 아닌(듯이 보이는) 사실에 뼈대를 얽고 살을 붙여 어엿한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후보작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앞서 줄거리를 소개한 것처럼 짐짓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읽어보면 다르다. '읽는 맛' 때문이다. 특유의 익살과 재치, 그리고 막판의 아련함은 변함이 없다.

예심에선 작품 세계의 변화가 후보작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한 인물(이한봉은 독립유공자다)은 그의 소설에서 희귀했기 때문이다.'애매하고 흐릿한, 주변부의 인간을 주로 다뤘던 작가가 소위 영웅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체했다(김형중).' 작가도 비슷한 생각일까.

"글쎄, 난 동일한 인물로 보이는데. 이름이 있고 없고는 나한테 중요한 게 아닌데. 인간의 행적이나 삶이 세상과 부딪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의 문제는 늘 내 관심 대상이었고."

사실, 늘 이런 식이다. 당대의 입담꾼은 한 번도 '어떻게 내 생각을 알아맞혔지?'하고 반기지 않는다. 엉뚱한 사연을 소설 중간에 끼워넣은 대목을 지목하면 "농담이지, 재미있지 않아?"라며 되묻고, 이유를 따지면 "사실 내가 재미있거든"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거기서 막혀버린다. 말에서나 글에서나 똑같이 발견되는 의뭉스럽고 능청맞은 특유의 화법은 의중을 감추려는 치밀한 공작일 수 있다. 아니면 굳이 작가의 속셈까지 알 필요는 없지 않으냐, 그냥 재미있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미학일 수도 있고. 다시 성석제 식으로, 아니면 말고.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