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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55.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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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9월 금강산에서 열린 8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김관규(93·오른쪽)씨가 북에 두고 온 딸 김동숙(69)ㆍ동희(64)씨를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다.

40여 년 만에 만난 동생과 누나는 그러곤 말을 잇지 못했다. 1985년 9월 21일 아침 평양의 고려 호텔 3층 면담실. 의자에 앉아 동생을 기다리던 북한의 김일보씨도, 누나를 향해 달려든 남한의 동생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비슷한 시간 서울의 워커힐 호텔에 꾸며진 서울 상봉장. 서울에 사는 팔순 노모는 북에서 온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어머니 맏아들 형석이가 왔어요.” “어머니, 어려서 돌 장난을 하다가 다친 흉터가 있잖아요. 이걸 낫게 하느라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했어요.” 귀가 안들리고 정신이 흐린 어머니는 아들의 눈물 속 절규 앞에서도 눈만 껌벅거렸다.

2년 전 KBS가 시도해 전 국민에게 감동을 준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또 다른 후속 편이었다. 이때 히트했던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노래가 다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감동의 현장에도 남북 간 치열한 대결의식이 내포돼 끼어들곤 했다.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비비다가도 호텔의 여성 접대원이 인삼차를 들고 방문을 불쑥 열면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김일성 수령님 덕분에 잘 살고 있습 네다. 걱정 마시유.” “공화국 북반부는 지상낙원입네다” 등…. 남측 이산가족의 애간장을 더욱 녹이는 순간이었다.

이런 안타까운 모습들은 2000년 6·15 선언 이후의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도 남아 있었지만 이때가 가장 심했다. 당시 북한 당국은 북측 가족들을 평양에 불러 모아 한달 동안 예행연습을 시켰다. 여성들에겐 함흥 방직 공장에서 나온 당시 최고급의 벨벳 한복을, 남성들에겐 양복을 사 입혔다. 체제선전 문구는 물론 말하는 요령까지도 철저히 훈련시켰다.

남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85년 남측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서울 워커힐 호텔로 온 북측 방문단은 모두 50명. 그러나 이 중 31명만 남측의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북측 가족들이 만나려는 남측 가족 중 일부가 경제 사정이 어려운 ‘달동네’주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북한의 가족을 만나도록 주선하는 게 마땅한 일이었지만 정부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굳이 만나겠다는 사람들에겐 그럴듯한 양복과 구두를 사 입혀 상봉장에 나가도록 했다.

이산가족 문제를 놓고 남북이 벌인 이런 체제 대결적 움직임은 70년대 초 더욱 심했다. 북한은 인도주의를 운운하면서 이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미군 철수, 보안법 폐지를 회담장에서 버젓이 주장했다. 판문점과 서울 간 이동 중에는 우리 측 주유소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유사시에 대비한 것이다. 이러다 보니 7차에 걸쳐 회담을 했지만 어떤 성과가 나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 이후 벌어진 상봉에는 이런 씁쓰레한 기억이 점차 사라져 갔다. 동시에 ‘감동’도 많이 탈색됐다. 불가피한 측면이다. 앞으로 이산가족 문제는 면회소 설치 등 제도적 차원의 해결로 진입하고 있다. 이는 남북 관계 진전의 한 단면이다. 과거 남측이 이런 제안을 하면 북측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감동을 연출할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1년에 두 번꼴로 매번 수백명씩이 만나는 현재 방식으로 상봉이 진행되면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10만여 명이 꿈을 이루는 데 걸리는 시간은 450년. 이산가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산 1세대의 안타까움은 더해간다. 화상 상봉, 생사 확인을 위한 편지 교환 등 할 수 있는 대책은 모두 마련돼야 한다.

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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