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수요기획', 콰이강의 다리 공사현장 한국인 조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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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콰이강의 다리'하면 우선 경쾌한 휘파람 행진곡이 입가에 돈다. 폭파 장면으로 우리 뇌리에 남은 할리우드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연합군 포로들이 동원됐던 이 '콰이강의 다리' 공사 현장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군수물자 보급로 확보를 위한 철도 건설에 연합군 포로들을 동원한다. 그리고 42년 일본은 조선 전역에 걸쳐 영어를 할 줄 아는 청년들 300여 명을 뽑아 '군속'이라는 명분으로 '콰이강의 다리' 포로감시원으로 기용한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그들은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으로 간주돼 전범재판을 받았다. 무려 23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프로그램은 소설 '콰이강의 다리'를 쓴 작가 정동주씨와 함께 역사의 현장을 차례대로 밟으며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과거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당시 공사 현장에 연합군 포로 수송을 담당했던 오행석(88)씨는 일본군들의 만행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일본군은 공사 길목마다 사람 머리를 잘라 달아놓기도 하고, 살아있는 사람의 목에 총을 쏴 피가 줄줄 흐르고 있는 채로 끌고 다녀 겁을 주기도 했다고 증언한다.

제작진은 직접 태국에서 버마까지 415㎞를 연결하는 '콰이강의 다리' 현장을 방문한다. 폭격 후 콰이강의 다리는 태국 정부에서 새로 지었다. 처음 만들어졌던 다리는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상처는 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철로 공사장에서 일했던 분미(79)씨는 아직도 집 한 쪽에 다리 공사 때 사용했던 연장과 군모를 보관하고 있었다.

태국 곳곳엔 '콰이강의 다리' 공사를 위해 희생된 일본군들을 위한 위령비 및 분향소가 있다. 그러나 정작 일본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한국인들을 위한 기념비나 애도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또한 일본은 지금까지 '콰이강의 다리'에서 희생된 한국인들에 대한 사과도 없다. 91년에 제기된 보상 청구 소송도 99년에 기각됐다.

송준기 PD는 "콰이강의 다리에서 희생된 한국인들에 대한 진상 조사는 아직도 정확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모두 버림받았다. 오랜 세월 고통받은 그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를 전해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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