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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서 불꽃…「실명제」공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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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정당의 실명제 보류 주장이 지난 26일 국회 재무위에서 최초로 공식화한 이후 29일 당정정책조정회의에서 연기론과 보완강행론이 불꽃튀는 토론을 하기까지의 3일간은 변전무상한 드라마와도 같았다.
○…26일 저녁 민정당 최명혜·박종관 의원의 재무위 발언이 있자 27일 아침부터 민정당 간부들은 간접적·우회적 화법으로 실명제 개편론을 지원사격하기 시작했다.
실명제의 「실명작전」이라고도 할 민정당의 실명제에 대한 2차 공세가 개시된 것이다. 뒤늦게 알려졌지만 최·박의원의 재무위 발언도 당 간부들의 사전사인을 받고 했던 것. 두 의원의 발언이 있고 난 후 그날 저녁 당 간부들은 G호텔에서 회동, 그전부터 은밀하게 짜온「실명작전」을 재점검했다. 이재형 대표위원을 비롯한 당 간부들의 「완곡한」발언이 집중적으로 나온 27일 하루의 분위기는 문자 그대로 실명제가 실명직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28일 분위기는 뭔가 조금씩 달라지는 기미를 보였다.
28일 아침부터 중요 당 간부들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권익현 사무총장·진의종 정책의장·이종찬 총무 등 당 3역은 이 시간 김준성 부총리·강경직 재무장관과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등과 대좌하고 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난 후 당 3역들은 당사에도 들르지 않은 채 여의도 모음식점에서 열린 국회 상임위원장 오찬으로 직항.
뭔가 분위기가 반전되고 있다는 신호가 울린 것은 권총장이 당사로, 이총무가 국회로 각각 돌아온 직후였다.
이총무는 정부와의 협의 결과를 묻자 『정부·여당은 실명제를 이번 회기 중에 통과시킨다. 다만 국회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자본시장의 위축 등을 고려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또 권총장은 보도진과의 접촉을 회피했고 3역을 만나고 나온 다른 간부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조금 유동적인 것 같다. 협의를 좀더 해야 할 모양이다』는 등등….
이때 당이 아닌 정부 요로쪽에서 『실명제 법안을 이번 회기 내에 통과시키기로 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당 3역의 심상찮은 표정, 현저히 낮아진 실명제 비판론 등과 연결시켜 볼 때 이날 상오의 당정회동에서 민정당의 작전에 제동이 걸린 게 분명해 보였다.
권총장을 만나고 나온 김용태 대변인이 『29일 밤에 예정된 당정정책조정회의는 예결위에 장관들이 출석해야 하기 때문에 무기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실로 민정당의 적공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간부들은 그래서 그런지 침울한 표정이었고 어세도 약화된 것 같았다. 『실명제의 큰 룰은 그대로 두고 드러난 문제점을 보완한다』 『실명제는 실시하되 의원들이 국회에서 지적할 수야 있지 않으냐』는 등 보류·연기론은 이날 하오엔 쑥 들어갔다.
그런가하면 실시보류론을 던져 놓은 채 27일 하룻동안 재무위에서 실명제 문제에는 입을 닫고만 있던 민정당 의원 가운데 유경현 의원이 나서 실명제 찬성발언을 했다. 대세는 반전 된게 명백한 것 같았다.
○…하오 4시쯤 권총장이 보도진들의 면담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극히 「말」을 삼가고 신중한 태도를 취해온 권총장은 원안 통과를 예고한 정부측 관계자의 말을 확인하려하자 『음, 누구 말인지 알겠구먼』이라며 알고 있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밝힐 것, 말할만한 것이 없다. 민정당은 정말 고민하고 있다. 실명제에 대한 당론도 살아 있고 보완해야 겠다는 의지도 그대로다. 추측기사 쓰지 말고 냉각을 갖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국회심의과정을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곧 권총장은 국회로 갔고 이어 이재익 대표위원장 방에 당3역과 김대변인이 모였다. 누구도 회의결과를 말하지 않았다. 이대표위원은『실명제 문제는 묻지 말고 관형찰색(얼굴표정을 살핀다는 뜻)만 한다는 조건으로 만나자』며 질문의 핵심을 피했다.
진 정책위 의장은 외부로 나가고 권총장·이총무는 대표위원실을 나와 『예결위를 보러간다』며 사라졌는데 그 시간 국회에 나와 있던 김준성 부총리를 만났으리라는 것이 유력한 추측이다.
하오 6시반쯤, 이번에는 운영위원장실에서 권총장·이총무·오세응 정무장관·김용태 대변인이 다시 회의를 가졌다.
약 1시간반동안의 회의가 끝나자 권총장은 외부로 나갔고 김대변인이 『연기하기로 했던 당정정책조정회의를 29일 상오 8시30분에 갖는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뭐가 또 달라지는게 아닌가 하는 분위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정정책조정회의라면 당쪽의 의견이 우세한 회의라는 사실과 연결시켜 볼 때 무기 연기키로 했던 것을 다시 소집한다는 것은 국면의 재전을 뜻한다는 추측이 나온 것이다.
한 당 간부는 『실명제 3, 4년 후로 연기 가능성』이라는 중앙일보 1판 표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안있어 이총무가 김대변인을 찾아왔다.
이총무는 『사람도 수술을 하려면 체력이 강할 때를 골라야 하는데 지금 우리 경제가 그 정도가 되는가. 왜 이렇게 경제가 허약할 때를 적기라고 보는지 모르겠다. 경제를 임상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고 푸념했다.
이때 외부로부터 권총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총무와 김대변인은 번갈아 통화했다. 이어 두 사람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밀담에 들어갔고 요로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기도 하고 전화를 걸기도 했다.
○…29일 상오 당정정책조정회의 참석에 앞서 권총장은 『이 건에 관해서는 민정당 움직임에 더 비중을 두고 보는 것이 좋을 것』 이라며 『실명제의 연기여부에 관한 논의를 정의사회구현과 결부시키지 말고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생각해달라』는 특청까지 해 정세가 반전하고 있음을 암시.
권총장은 취소했던 당정정책조정회의를 밤새 다시 하기로 한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우리의 신중이 언론의 논조에 난조로 비친 것 같아 부득이 앞당길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
김용태 대변인 역시 『오늘만은 석간신문이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해 이날의 회의가 연기여부의 원칙에 관한 토론보다는 민정당이 주장하는 3년 연기안을 정부의체면을 덜 손상하면서 어떻게 잘 포장하느냐에 쏠릴 것임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 같은 낙관적인 분위기는 상오 9시반쯤이면 당으로 돌아와 전말을 발표하리라던 민정당의 예고와는 달리 회의가 상오 10시를 넘기고 자리를 옮기는 사태로 발전하자 또다시 흔들렸다.
김대변인은 회의가 늦어진 이유는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다른 관계자는 예상과는 달리 7·3조치의 입안자인 강경직 재무장관과 김재익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 다시 내년 1월 l일부터의 실시에 민정당이 협조해 것을 요청하고 그렇게 해야하는 당위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후문.
이에 대해 민정당측은 시종일관 난색을 보이며 실시시기를 가변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경제계에 미칠 충격이나 실명제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을 주장했다는 얘기다.
특히 김상협 국무총리가 어떤 결정적인 발언을 하지 않아 장소를 옮겨 토론을 계속 했다. 3시간여의 마라톤 협의 결과 『욕을 좀 먹더라도 실명제를 하긴 해야 한다. 그러나 법을 만들어도 제대로 시행이 안되면 더 문제가 되니 실시시기는 더 늦출 수도 있다. 또 납득이 안가는 사람이 많다면 잘못된 것은 고쳐갈 수도 있다. 당정간에 더 협조를 해보자』는 중간 결론이 났다는 것이다.
12시나되어 당으로 돌아온 민정당 간부들은 비교적 밝은 표정을 지어 어떤 형태로든 당의 의사가 많이 반영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김용태 대변인은 기자실로 바로 오지 않고 사무총장실에서 권총장·윤석순·이상재 사무차장 등과 자신이 쓴 발표문초고를 검토하는데 2O분간을 소비했다.
김대변인의 초고는 발표된 문안보다 연기에 대한 당의 입장을 보다 더 부각시키는 내용이었다는 후문.
김대변인은 문답을 통해 『법안은 이번 회기에 통과시키나 국회심의과정에서 대폭 보완할 예정』이며 『실명제의 실시시기도 보완대상에 포함된다』고 분명히 못박아 회의의 골자가 민정당 의사대로 실시시기는 연기하되 법안은 통과시킨다는 것임을 확인. <전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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