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과정 생략된 추곡 수매가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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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3% 인상에 7백만 섬-. 올해 추곡 수매 문제는 예년에 없이 매우 신속히,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처리되었다.
원래 추곡의 수매 가격과 수매량을 결정하는 과정은 금리나 환율 등의 여느 경제 정책과는 달리, 다소 소란기를 느낄 정도로 이견이 분분한 법인데 이번에는 그렇질 않았다. 그만큼 행정력이 효율화되고 노하우가 축적된 덕분인지 어쨌든 실랑이 과정은 최소로 축소됐고 결론으로의 접근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예년 같으면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여기 저기서 수매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고 정기 국회에 이르러 토론이 절정에 이르게 마련인데 올해에는 이같은 과정이 최대한으로 생략 (?)하려했던 노력이 확연했다.
예년 같으면 농수산부의 입장, 경제기획원 입장, 국회의 입장, 여기에 각 연구 기관의 입장까지 가세되어 좀 시끄럽긴 하지만 제법 그럴듯한 정책 토론의 장을 국민들에게 보여줬었다.
작년엔 기획원을 대변하는 개발 연구원 (KDI)과 농수산부를 대변하는 농촌 경제 연구원이 세미나 형식을 빌어 대리 전쟁까지 했다. 올해 경우는 처음부터 쉬쉬하는 가운데 최근까지 만해도 추곡 수매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실무 당국자를 붙들고 「오프더 레코드」를 전제로 아무리 캐물어도 정말 자기도 모른단다. 이번 추곡 수매에 관한 한 실무 당국자는 장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장관 말고는 누구라도 추곡 수매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은 자기의 소신이나 주장이 아니라 「발설」로 간주됐다.
국회의원들 말고는 누구도 입을 떼려하지 않았다. 국회가 열렸으나 정부는 확실한 숫자 제시를 계속 유보했다. 지난해에는 수매가를 10% 밖에 올릴 수 없다고 미리 답변했다가 혼이 났던 경험을 통해 터득한 요령 때문이었는지.
당초부터 정부의 의중은 국회 답변 과정을 통해 여론을 수렴한다거나 원안을 여과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매년 치러야하는 골치 아픈 요식 절차로 여겨졌고 따라서 이것을 여하히 재주 있게 넘기느냐가 관심거리였다.
그래서 짜낸 묘안이 빗장을 닫아걸고 조용히 있다가 막판에 가서 해치우자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정부의 입장을 밝혀서 토론의 표적판이 되는 것은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격의 어리석음이라고 판단되었던 모양이다.
사실 추곡 수매 문제를 둘러싸고 장시간 논쟁을 벌이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 소비가 따른다. 그러나 결과 여부는 불문하더라도 그 자체가 소외된 농민들에 대한 그 나마의 애정 표현 일수도 있다.
또 농촌 정책을 한번 재점검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어쨌든 왜 자꾸 정책 결정을 밀실로 가지고 들어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추곡 수매 발표를 하면서 이 북새통을 이용해 보리 방출 가격을 20%나 대폭 올린 것은 물론 보도자료에 몇%라고 표시된 숫자를 색연필로 일부러 지우는 행위 등은 아무래도 유치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칫 기습을 당했다는 기분을 들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장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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