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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I Report] 한국 금리정책 너무 경직적인 게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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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베스트셀러 경제학 교과서의 저자 맨큐가 앨런 그린스펀 의장 재임 동안 미국 연준(FRB)의 금리가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지를 분석했다.

그 결과 1990년대 초 이후 미국 정책금리의 변동은 근원 인플레율(식료품과 에너지 가격을 뺀 소비자 물가지수의 상승률)과 실업률 두 가지 경제지표의 변동에 의해 대부분(약 85%) 설명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연방기금 금리의 수준이 주로 인플레율과 실업률의 변동에 따라 비교적 단순하게 결정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인플레율이 높아질 경우에는 물가안정을 위해 연방기금 금리를 올리고, 실업률이 높아질 경우에는 총수요 진작을 위해 금리를 내려왔다는 얘기다.

그만큼 미국의 통화정책과 관련해 제기되었던 수많은 기타 이슈(예를 들어 주식시장의 과열 여부, 재정정책의 방향, 세계 곳곳의 금융위기 등)는 통화 당국의 금리 수준 결정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지난 15년간의 미국 경제는 성장과 물가 양면에서 호조의 실적을 보였다. 따라서 미국의 금리정책이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지난 9일의 인상으로 미국 통화 당국은 지난해 6월 이후 정책금리를 10차례에 걸쳐 2.5%포인트 인상했다. 소비.기업투자.산업생산 등 모든 경기지표와 고용지표가 호조를 보이는 가운데 인플레이션 압력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충분히 예상되었던 결정이었다. 더욱이 미국도 부동산 시장의 과열을 걱정하던 참이었다.

경기과열에 대한 경계와 부동산 가격 안정이라는 정책 목표를 맞이한 미국 통화 당국 입장에서 정책금리의 인상은 당연한 결정이었고, 큰 고민 없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또 사전에 예견되었던 금리 인상이었기에 금융시장에 미친 영향도 미미하다.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 통화 당국은 고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단순화해 금리 정책의 최종 목표인 물가와 성장만을 놓고 보면 해답은 자명하다. 근원 인플레율(6월 2.3%)이 물가안정 목표 범위(2.5~3.5%)를 밑도는 안정세를 보이고 있고, 또 설비투자와 소비의 회복 속도가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등 성장과 고용전망이 매우 불투명한 상태다. 이러한 경제상황에서는 콜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문제는 통화 당국이 감안해야 할 또다른 정책목표, 즉 부동산 가격안정 때문에 복잡해진다. 경기 부진을 타개하면서 동시에 부동산 가격 안정을 기해야 하는 두 정책과제가 상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한.미 정책금리 역전에 따른 자본 유출의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경제 기초 여건만 고려해 금리 인하를 선택하자니 그것이 부동산 시장에 미칠 파장이 우려된다. 시장이 통화 당국이 보내는 신호를 잘못 해석해 8월 말로 예정된 부동산 대책의 효과를 희석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리 인하가 부동산시장에 보내는 잘못된 시그널을 걱정해 당분간은 금리 인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고 해서, 최근 일각에서 제기되는 금리 인상 논의가 수긍이 가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본다.

이달 말 발표되는 부동산 대책에는 주택공급 확대, 세제 변화, 부동산 대출에 대한 금융감독 강화 등 가능한 모든 부동산 대책이 망라될 것으로 보인다. 주택가격 문제가 특정지역에 한정되어 나타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에 걸맞은 미시적 대책들이 바람직하고 또 충분히 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금리 인상과 같은 경제 전체에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시정책은 경제 전체의 물가 상승 압력과 경기흐름을 크게 보고 운영되어야 하고 특정 지역의 부동산을 잡기 위해 동원돼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혹자는 80년대 말의 일본을 예로 들면서 그때 일본 중앙은행이 보다 선제적으로 금리를 인상했다면 부동산 버블의 형성과 팽창, 그리고 그 붕괴에 따른 장기불황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은 연평균 성장률이 5%를 넘고, 주택.상업지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부동산 가격이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급등하는 등 경제 전체가 과열상태에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기가 부진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고 물가가 안정되어 있는 최근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판단이다. 따라서 일본 버블의 예에서 금리 인상의 교훈을 얻기 힘들다고 본다.

한.미 간 정책금리 역전에 따른 자본 유출 우려도 아직까지는 기우일 가능성이 있다. 시장금리 기준으로 보면 우리 금리가 아직 높다는 점, 미국의 정책금리가 우리보다 높았던 99년 하반기 이후 약 2년 동안의 경험, 우리나라 대외자본거래의 대종을 이루는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의 최근 움직임 등을 감안할 때 실증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우려가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지난 수개월 우리 통화 당국의 콜금리 동결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향후의 금리정책에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 금리의 탄력성 문제다.

99년 이후 미국과 우리나라의 정책금리와 성장.물가의 추이를 비교해 보면, 굳이 엄밀한 통계적 방법을 동원하지 않더라고 쉽게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미국은 정책금리를 빈번하게 큰 폭으로 조정해 왔고 그 결과로 성장과 물가의 변동성이 낮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성장과 물가의 변동성이 미국에 비해 높은데도 정책금리의 변경이 그리 잦지도, 또 변동폭이 크지도 않다. 주요 경제지표들의 움직임에 대해 금리의 반응도(responsiveness)가 낮다는 얘기다.

통화정책의 성공 여부가 인플레율과 성장률 변동의 진폭을 줄이는 데 달려 있다면 그린스펀 식의 반응도 높은 금리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의 부동산 대책이 효과를 발휘해 주택가격 안정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때쯤에는 통화정책의 주요 과제로 금리정책의 탄력성 제고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정책금리 '한국<미국' 영향은 …< b>

미국의 시중 금리가 한국보다 높아지면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미국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으로 한.미 두 나라의 정책금리가 역전되면서 이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연방기준금리 인상 직후 "한.미 간 단기 정책금리가 역전되더라도 국내외 자금의 급격한 이동 등 금융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은행도 이날 비슷한 자료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부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금융전문가들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연준리의 금리 인상이 중장기적인 추세로 굳어진 이상 외국인 자금 이탈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주장한다.

정부 분석에 동의하는 금융전문가들조차 "아직 우리나라 시중 실세 금리가 미국을 웃돌고 있기 때문에 자본이탈까지 우려할 상황은 아니지만 실세 금리가 역전되면 장담할 수 없다"고 걱정하고 있다.

선진국의 금리 인상은 시차를 두고 후진국의 금융시장과 실물시장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게 국제금융학계의 중론이다. <그림>

선진국의 실세 금리가 오르면 신흥시장에 흘러들었던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져 나간다. 이렇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외자 이탈 국가의 주가 급락이다. 주가가 떨어지면 소득이 줄어든 가계는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 기업의 매출은 줄어들 것이고, 결국 투자마저 위축된다. 뒤를 이어 투자기업의 성장성을 어둡게 보고 투자자들이 주식을 매도하면 주가는 다시 떨어진다.

많은 전문가가 1980년대 이후 중남미국가들의 경제위기가 바로 이런 경우라고 보고 있다.

미국이 경기를 조절하기 위해 82년 이후 공격적으로 정책금리를 인상한 것이 멕시코의 외자 이탈과 주가 폭락, 기업 줄도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95년 이후 빚어진 중남미 국가들의 경제위기(이른바 테킬라 위기)도 미국의 선제적인 금리 인상 이후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9년 이후 빚어진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2차 외환위기도 미국의 급격한 정책금리 인상에 원인이 있다며 미국의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FRB는 99년 6월 이후 11개월에 걸쳐 기준금리를 4.75%에서 6.5%까지 올린 바 있다.

임봉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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