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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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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앙일보와 문예중앙이 주최하고 LG그룹이 후원하는 제5회 미당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의 최종심에 오른 후보작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후보 작품과 시인.소설가의 작품 설명과 심사에 참여한 평론가의 해설 등을 담아 모두 열 차례 연재합니다. 올해는 누가 영광을 차지할 것인지 지켜봐 주십시오. 연재 순서는 시인.소설가 이름의 가나다순입니다.

시 - 고재종'독학자'

깬 소주병을 긋고 싶은 밤들이었다 겁도 없이

돋는 별들의 벌판을 그는 혼자 걸었다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풀잎 끝마다 맺히는 새벽이슬은 불면이 짜낸 진액

같았다 해도 해도 또다시 안달하는 성기능항진증

환자처럼 대책 없는 생의 과잉은 끝이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어쩌다 만난

수수모감처럼 그에겐 고개 숙이고 싶은 푸른 하늘이

없었다 아무도 몰래 끌려가서 아무도 몰래

들짐승들이 유린한 꽃의 비명을 들을 수도 없었다

(부분, 문학사상 2004년 10월호 발표)

◆고재종 약력

▶1959년 전남 담양 출생 ▶8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바람 부는 솔 숲에 사랑은 머물고'(87년) '사람의 등불'(92년) '그때 휘파람새가 울었다'(2001년) 등 다수 ▶신동엽 창작기금(93년), 소월시문학상(2001년) 수상 등 ▶미당문학상 후보작 '독학자'외 27편

생태시인 놀라운 변신 내면의 절망 파고들어

고재종 시인은 지난해 갑작스레 시 세계가 변했다. '독학자'란 시에서 알 수 있듯, 시적 자아는 고독하고 내면은 황량하다. 자살을 작심한 이의 심정이 떠오를 정도다.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농촌시, 생태시의 작가였던 그가 느닷없이 참담하고 절망스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까닭은 다소 의외의 곳에 있었다. 이라크 전쟁이었다.

"작년 김선일씨가 죽은 소식은 충격이었다. 인류의 이성과 문명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 '이것밖에 안 되나'라는 생각뿐이었다. 외부의 절망은 자연스레 내 안의 절망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내 안에서 절망과 죽음을 수용해낼 때 내 생태시도 비로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도 시인의 변화를 감지하고 주목했다. 하여 "시 세계가 정점에 올랐다는 느낌을 주었다"(유성호)고 평할 만큼 현재 그의 작품성을 높이 샀다. 대신 이런 지적도 있었다.

"자연을 가장 중요한 시적 소재로 삼던 시인이 지난해부터 의미가 충만한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 시적 비약이란 의미에서 한자어나 관용어를 인용하는데 툭툭 걸리는 느낌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의도적인 시도였다"며 "평론가가 의중을 못 읽었다"고 답했다.

"예전에 시를 쓸 때는 완성도를 지나치게 따졌다. 하여 너무 매끄럽다는 소리도 들었다. 생태시를 쓸 때는 적절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내면의 죽음을 말하려 한다. 시를 읽으면서 사유를 하게끔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때로는 툭툭 걸려야 맛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은 지금 광주에 산다. 고향인 전남 담양에서 최근 옮겨왔다. 이제 농사는 짓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여기저기에 강의를 나간단다. 수화기 너머 울리는 남도 사투리가 정겹다. 농부의 갈라 터진 손등 같은 시를 생산하던 남도 시인이 절망을 말하는 시절이다. 내몰리듯 절망을 말해야 하는 시절이다.

소설 - 구효서 '소금가마니'

◆작품 소개

어머니 유품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일어판을 발견한 나. 무학인 어머니가 일어로 된 철학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뒤이어 자연스런 회상. 아버지는 늘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는 두부를 만들어 팔아 가족을 연명했다. 두부를 내기 위해, 그러니까 간수를 내기 위해 헛간엔 늘 소금가마니가 쌓여있었고…. 소설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피붙이의 고단한 삶을 들춰낸다. 소재와 주제 면에서 한국 문학의 적통을 잇는 작품이란 평이다.

(창작과비평 2005년 봄호 발표)

◆구효서 약력

▶1958년 인천시 강화 출생 ▶87년 중앙일보로 등단 ▶장편 '늪을 건너는 방법'(90년) '낯선 여름'(94년) 등, 소설집 '노을은 다시 뜨는가'(90년)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93년)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95년) 등 다수 ▶한국일보 문학상(94년)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소금가마니'

궁핍한 시절의 어머니 그 눈물처럼 짠한 울림

소설가 구효서는 상복 없는 작가로 통한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숱한 화제작을 낳았지만 겨우 한차례 상을 받았다. 94년작 장편 '낯선 여름'이 홍상수 감독을 세상에 알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원작이라는 걸 아는 이도 많지 않다. 지난해 황순원문학상에서도 수상작 '보물선'(김영하)과 열띤 경합을 벌였다.

올해도 그의 작품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예심 심사위원의 심사평이다.

"그저 평범할 뿐인 전 시대 아낙으로서 어머니의 삶과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적 성찰을 병치시켜 일상의 삶에 철학적 깊이를 부여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이즈음 하나의 경향을 형성하고 있는 인물사적 소설 쓰기의 백미라 할 만하다."(김형중)

스토리는 다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의 혼란함과 어머니의 고단한 삶 옆에 폭력적인 아버지와 두부를 만들어내는 가족의 '밥줄' 소금가마니가 자리 잡고 있다. 한편의 6.25 특집 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이다. 대신 소설은 쫀쫀하다. 등장 인물마다 얽히고설킨 갈등과 이들이 벌이는 갖가지 사건이 매우 유기적으로 배치됐다. 작가의 노련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여 이 짧은 소설은 하나의 시대성을 획득한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이 시대 모두의 어머니로 읽히는 이유다. 한데 왜 '소금가마니'일까. 작가의 말이다.

"콩으로 두부를 내기 위해 간수를 내는 장면을 본 적 있느냐. 짜내는 간수는 흡사 눈물과 같다. 맛 또한 그렇다. 그때 어머니가 쏟았던 많은 눈물은 간수처럼 짜고 썼을 것이다. 헛간에 쌓인 소금가마니는 가족의 밥줄이다. 하지만 어둡고 습한 곳에 존재한다. 아니 그런 곳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지난 시절 한 번도 화려하게 살지 못한 어머니의 삶과 소금가마니는 결국 같은 것이다."

다시 읽어보니 꼭 맞다. 작가는 짐작보다 한참 치밀하고 노련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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