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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세상읽기

EU 인권정책 얕잡아보면 대북 문제 탈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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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김회룡]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유럽연합(EU)의 수도’ 벨기에 브뤼셀의 11월은 구름 낀 하늘로 늘 우중충하다. 이 회색빛 고도 중심부에 난 ‘뤼 드 라 르와 (Rue de la Loi)’, 즉 ‘법의 길’ 동쪽엔 X자형의 거대한 18층 빌딩이 위용을 자랑한다. EU 집행위원회 본부 ‘베르레몽(Berlaymont)’이다. 베르레몽은 이곳에 있던 옛 수도원 이름으로 EU 집행위원장, 유럽이사회 의장 등 EU 수뇌부 모두가 여기서 일한다. 이 웅장하고 독특한 건축물이 유럽연합의 심벌로 통하는 까닭이다.

 EU의 심장이란 상징성뿐 아니라 이 건물에 얽힌 일화는 유럽 통합의 민낯을 보여준다. 건물이 완성된 건 1967년. 이때엔 치명적인 석면이 쓰였고 베르레몽도 예외는 아니었다. 석면의 유해성이 밝혀지자 EU는 대대적 보수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91년부터 보수 공사가 시작된다. 한국 같으면 뚝딱뚝딱 2~3년이면 족했을 게다. 하나 예산 문제에다 회원국 간 이견으로 최종 마무리된 건 2004년. 무려 13년이 걸렸다. 건설 기간 8년보다 5년이나 길었다. EU의 더딘 업무처리 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 케이스였다.

 여기서 남서쪽으로 10분만 걸으면 또 다른 EU의 상징, 유럽의회가 나온다. 건물 중심엔 28개 회원국 의원 751명이 격론을 벌이는 본회의장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둥그런 회의장 상층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통역 부스다. 의원들의 발언 전부를 28개 회원국에서 쓰이는 24개 언어로 몽땅 통역해야 하는 까닭이다. 회의뿐 아니다. 중요 문서들도 죄다 24개 언어로 발간된다. EU 업무가 얼마나 느리고 복잡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도 나름 장점이 있다고 EU 관계자는 역설한다. “28개 회원국은 물론 수많은 이해 관계자와 오랜 협의를 거치는 까닭에 합의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결정되면 일관되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또 현안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져 이 원칙대로 일이 진행된다. 그래야 회원국 사이에 잡음이 안 나는 까닭이다.

  EU 주도로 발의돼 지난 18일 유엔 총회 3위원회에서 통과된 북한 인권결의안도 이런 케이스다. 이 결의안은 다음달 중·후반 유엔 총회에서 최종 채택될 게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 되면 결의안 권고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김정은 등 북한 수뇌부의 국제형사재판소(ICC) 제소를 논의할 것이다.

 최고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북한이다. 북녘에선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모욕일 게다. 10만 명이 모인 평양을 비롯, 북한 전역에서 군중집회가 열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사태는 현재 추진 중인 남북한 관계 개선에 큰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지난 9월 북한 외교의 실세 강석주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브뤼셀을 방문한 것도 이 결의안 때문이었다. 결의안에 담긴 제소 관련 조항을 빼기 위해서였다. 국내엔 안 알려졌지만 당시 그는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는 2003년 중단된 북-EU 간 ‘인권대화’를 재개하자는 것이었다. EU는 전 세계 인권 증진을 위해 이 분야에서 악명 높은 나라들과 인권대화를 해 왔다. 다음은 스타브로스 람브리니디스 EU 인권특별대표의 북한 초청이었다. 나름의 성의 표시였다. 그러나 이런 추파에도 불구하고 EU는 흔들리지 않았다. EU는 예년보다 훨씬 강도 높은 북한 인권결의안을 밀어붙인다.

 웬만한 나라는 핵심 목표를 위해 다른 사안을 접기도 한다. 전략적 융통성이다. 북핵 협상을 위해 인권 문제는 잠시 거론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달 13일 통일준비위원회에서 평소 역설하던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말을 아꼈다. 북측이 무산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남북 고위급 회담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 유연성을 발휘한 것이다. 바로 2주 전 “북한의 반발이 두려워 이 (인권)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EU는 딴판이다. 전략적 유연성 같은 건 고려 대상에 넣기 힘들다. 무엇보다 EU라는 조직 특성상 어렵다. EU는 권력이 중앙에 집중돼 있는 일반 국가와는 달리 결정권이 수평적으로 분산돼 있다. 담당 조직의 독립성과 권한이 강하다는 뜻이다.

 28개 회원국 전체를 관할하는 EU 집행위 직원들의 숫자는 2만8000명. 교육·경찰 등을 뺀 한국의 중앙부처 공무원 숫자가 9만 명인 걸 감안하면 무척 소규모다. 숫자가 적은 만큼 개개인의 재량과 권한이 클 수밖에 없다. 다른 부서는 물론 상부의 뜻조차 쉽게 통하지 않는다.

 북한 인권 문제도 마찬가지다. 한국·미국과는 달리 북한이 핵 문제에 대해 유화제스처를 쓰든 말든 EU 내 담당 부서는 인권 자체가 개선되지 않는 한 갈수록 강력하게 따지고 들 게 분명하다.

 그간 북핵 등 대북 문제에 있어 EU는 존재감이 미미했다. 그러나 EU는 조직 생리상 앞으로도 인권 문제를 정기적으로, 그리고 갈수록 강력하게 제기할 게 분명하다. 간과해 왔던 EU 변수를 대북 해법이란 고차 방정식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건 이 때문이다. <브뤼셀에서>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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