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는문화 푸는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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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그래서 『쥬우신구라』의 복수담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만든것은 「갚는문화」요, 『춘향전』을 좋아하는 한국인이 만든것은 「푸는문화」 였다.
일본인들은 「갚는다」는 말을 잘쓴다.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말로 「스미마셍」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을 직역하면「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당신에게서 받은 그 은혜를 아직 「덜 갚았다」 「남아있다」라는 것이다. 은혜도 「갚」고 원수도 「갚」는다. 좋든 궂든 그것은 언제나 타자에게서 받는 것이고 타자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풀다」라는 말을 잘쓴다.
억울한 것도 분한 것도 풀고, 막혀있는 것도 풀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화풀이요, 분풀이요, 원풀이였다. 그 중에서도 한을 푸는것-거기에서 모든 한국인의 철학과 생활방식의 문화가 생겨난다.
민속신앙을 보아도 살풀이라는 것이있다. 한국의 샤머니즘의 특징은 죽은 영혼의 원한을 풀어주는데 있다. 푸닥거리란 말이 바로 그것이다. 푸닥거리는 풀어주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종교가 이랬을때 다른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예술형식도 감정을 풀어 주는데 그 근본을 두었다. 신흠이 쓴 시조 한 수를 읽어보면 알것이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할사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풀었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
노래를 부르는 것, 시를 짓는 것, 춤을 추는 것, 그 모든것을 시름을 풀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말로 다 풀지 못한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풀려고 한 것이다. 시름풀이 한 풀이가 한국인의 예술이었음을 이 시조에서 우리는 분명히 밝혀낼수 있다.
심지어 한국인은 이미 풀어진 상태인데도 심심한 것까지 다시 풀어 버린다. 그래서 노는것을 심심풀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풀이의 천재들이었다. 때로는 어두운 역사, 부조리한 사회구조등 외세에 짓밟히고, 권력자에게 시달리고, 가난에 쪼들리며 살아왔지만 그러나 한국인은 풀줄을 알았기 때문에 저 거대한 대륙의 한모서리에서도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고통, 그 서러움, 그 원한들을 바람에 띄우듯이, 물로 씻어내듯이 한숨으로 풀고, 노래로 풀고, 어깨춤으로 풀어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이 민족은 사실상 누구에게도 지배를 당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고통을 받지 않았다. 풀어버리는 능력이 있는한 어떤 비극이나 어떤 고통도 한국인의 가슴을 찢지 못했다. 아무리 무서운 독을 먹어도 해독제가 있으면 겁날게 없듯이 풀이의 문화가 있는한 고통의 독이 우리를 범하지 못했다.
우스운 일이다. 우리보다 풍부한 경제력을 과시하는 일본이나 서양사람들의 얼굴에는 초조와 불안이 감돈다. 통계 숫자로도 증명된다. 연간 자살자와 정신병환자가 그들의 GNP 못지않게 증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국민학교 아동들의 자살이 유행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의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긴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유행어는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해 정신병동을 찾아가거나 에펠탑·금문교를 찾아가고 번영을 자랑하는 저 고층빌딩 옥상에서 투신자살들을 한다.
기껏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차를 몰고 시속 1백마일로 달리다가 이번에는 교통사고로 죽는다.
마리화나를 먹지 않고서는, 섹스를 통하지 않고서는 바위처림 억누르는 문명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나 한국인은 이 스트레스를 푸는데 있어 단연 선진국의 첨단을 걷고있다. 오징어 한마리에 소주한잔 먹고서도 간단히 긴장을 풀어버릴줄 아는 민족이다. 퇴폐적이라고만 비웃을게 아니다.
한국의 선술집 같은 분위기는 일본의 어느 술집에 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풀기위해서 술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신세진 것을 갚기 위해서 술을 마시러 간다. 그것은 「거래의 술잔」이다.
신바람이 나서 젓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그 술주정꾼들은 돈 몇푼 안들이고도 마음의 고름들을 깨끗이 풀어짜낼 수가 있다. 한국사람들이 공중의 장소에서 큰소리로 떠든다거나 둘만 모여도 남들을 헐뜯는다거나 또 세계에서 가장 푸짐한 욕지거리를 잘한다는 것이 피상적으로 보면 한국 국민의 단점이 되겠지만 「풀이의 문화」에서 해석할때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될수도 있는 일들이다. 일본에는 기껏 욕이래야「바가야로」(바보야!) 정도다. 옥이 없는 문화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풀줄모르는 문화」라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미쳐 죽었거나 목을 새끼로 맸거나 마리화나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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