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체제」지대 얻어낼 속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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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월남이 붕괴된 75년 4월말 북경을 방문한 때로부터 7년만에 김일성이 중공을 방문한다.
사실 평양측은 78년 5월의 화국봉 방문을 비롯하여 이듬해 9월의 등소평 방문, 그리고 작년말의 조자양 방문 등 그동안 중공당·정부 고위층의 잇단 방문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그 기간에 중공지도부에는 권력구조의 개편과 이에 따른 정정불안이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답례방문이 부득이 미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는 의례적인 것이라 해도 김일성의 중공방문은 북괴-중공관계에 그이상의 뜻과 내용을 가진다.
특히 시기적으로 중공이 화국봉체제의 완전한 후퇴와 등소평에 의한 실용주의체제를 공식 확인하는 12전 대회폐막과 거의 동시에 김일성의 중공방문이 실현된 것은 각별한 뜻이 있을 것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수정주의를 추구하는 중공 12전 대회에 대한 지지의 표명, 특히 당 대회에 외국대표 등을 초청하지 않는 중공당의 관례에 비추어 김일성이 12전 대회체제의 첫 방문객으로 북경을 찾은 것은 이만저만한 지지도의 표명이 아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공측은 올해 4월 외국하객들을 대대적으로 초청, 유례없는 대행사로 치러진 김일성 생일행사에 공식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는 중공측이 공식적으로는 김일성 개인숭배에 동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조치였다.
이에 반하여 중공의 노선에 대한 북괴측의 경계도 그동안 만만치 않았다.
이는 개인숭배비관, 민주집중제의 강화와 자본주의국가들과의 관계개선 등 중공의 실용주의 노선의 북한파급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가령 문혁이래 두번째로 감행되었다는 최근의 한만 국경선봉쇄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같은 원활치 못한 양 체제간의 관계를 강호승인으로 개선, 강화해 보려는 것이 김일성의 7년만의 중공방문에 깔린 저의일 것이다. 즉 김일성은 12전 대회체제에 지지를 표명하고 그 댓가로는 김일성 세습체제에 대한 중공당국의 공식적 지지를 유도해 내자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북한의 경제사정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따라서 대 중공관계에서 북한의 최대관심사는 여전히 원유도입문제다.
북괴측은 78년부터 1백만t의 중공산 원유를 싼값으로 도입해오다가 80년부터는 80만t으로 감량 공급받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그 감량공급은 81년부터 소련산 원유가가 현실화됨에 따라 그 도입량이 40%로 줄어든 사실과 함께 북한에 심각한 에너지 난을 빚게 했다. 그래서 이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서 작년부터 50만t의 이란산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산이나 이란산을 국제시세로 도입해서 자체수요를 채워나가기에 외화사정의 압박을 받는 북한측은 어쩔수 없이 저렴한 중공산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가령 중공에 북괴-소련간의 접근을 견제하는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원유공급이 될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군사원조에서 북괴는 중·소의 경쟁적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한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북괴는 80년 이후 소제 전투기(85기)와 잠수함(3척)을 포함하는 주력 전투함종 보유수를 급격히 증강시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소련의 군사지원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소련측은 그 댓가로 나진항 사용권을 얻어내어 북괴-소련간 군사적 유대는 최근 국지적으로 매우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만약 북한이 소련의 군사거점이 된다면 북서부에서 소련의 압력과 남부에서 베트남의 위협을 받고있는 중공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6월 중공국방상 경로(경표)의 평양방문은 이런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밖에도 한국의 제3세제 진출에 대한 대책협의, 미-중공관계를 통한 주한미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가능성 타진, 88년 서울올림픽에 대한 불참종용 등 7년만의 중공방문이어서 김일성의 보따리는 무겁게 마련이다.
한가지, 김일성은 75년4월 중공방문 때처럼 한국전이 재발해도 『얻을 것은 조국통일이요, 잃을 것은 휴전선뿐』이라는 식의 호언장담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대 중공관계에서 실리를 추구할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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