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시간이 없어 책을 못읽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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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렸을 적 어머니는 무척 책읽기를 즐기셨다. 그때는 전깃불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바쁜 농촌에서 책을 읽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낮엔 베짜기, 빨래, 절구질 등등으로 아예 엄두도 낼수 없었을 터이고 밤이 되어도 가족들 치다꺼리로 제대로 잠 한번 마음놓고 못 주무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머닌 짬짬이 호롱불 심지를 돋우고 바짝 다가앉아 춘향전, 옥단춘전, 콩쥐팥쥐전등을 소리내어 읽으셨는데, 그럴때면 우리는 어머니옆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귀를 기울이곤 했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서 듣는 이야기는 재미있고 슬프기도 했고, 어떤때는 무엇을 의미하는 이야긴지 알수 없었지만 그때의 신비스런 감동은 다시 맛볼 수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책을 읽으시는데 철을 생각지 않으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저 틈만 나면 사과궤짝만한 낡은 책궤에서 표지가 죄다 해져나간 이야기 책을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듯 소중히 꺼내보고, 다시 넣어두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데 무슨 계절이 상관있을까만 유난히도 소란스러웠고 지끈거렸던 여름이 가고 머리를 식혀주는 시원한 이 가을엔 꼭 읽고 싶었던「그레이엄·그린」의 작품을 모두 읽어치우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챙겨 놓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한 페이지도 열지 못했다.
어머니가 독서에 열중하던 그 옛날 옛적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어머니 말씀을 빌자면 뒤로 걸어다니면서 일해도 책 읽을 시간이 남아 돌 세상이다. 베짜고, 절구질해서 쭉정이를 가려내는 일, 일일이 두레박질을 해서 식수를 마련하는 일, 빨아서 풀해서 밟아서 다듬이질을 해야만 입을 수 있던 빨래거리는 고사하고, 전기 밥솥에, 세탁기에, 젓가락질만 하면 입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진 봉지 속의 반찬을 사다 먹으면서도 시간타령이 웬말이냐는 말씀이다.
그렇다. 분명 그렇다. 그런데도 난 뭔가? 장난기 심한 아이 핑계로, 음주와 흡연을 즐기는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저 낡은 책장을 좀 새것으로 바꿀수 없을까 하는 잡다한 생각으로 시간을 때워버린다.
남자가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여자는 최소한 일곱 수레는 읽어야 하리라던 어머니.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그 남자를 다스리는 건 여자라 했다.
공처나 악처이야기가 아니라, 보다 많이 알고 익혀서 긴 안목으로 조언하라는 말씀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요새 같은 지식정보의 홍수 t고에선 더욱 절실한 일이다.
어머니도 고희를 바라보시지만, 지금도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거의 외고 계신다. 새삼 어머니의 독서열이 우러러진다. <서용 강동구 마천 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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