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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의 행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아무리 경천위지할 재주를 타고났어도 그것을 퍼볼 기회를 갖기란 매우 어렵다.
일찌기 남양초려에서 품은 천하삼분지계를 웅대한 스케일로 짜나간 제갈공명이나 위수가에서 빈 낚시를 드리우며 다듬은 경륜을 주재상이 되어 편 태공망의 고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극히 예외에 속한다.
대부분 경세제민의 큰 뜻이 학설로 끝나는 수가 많다. 이론대로 안 되는 것이 세상일이어서 그 학설을 실험해 보기가 어렵다.
온갖 사연들이 얽혀있는 세상사를 무색투명한 학설로써 가름하고 뒤틀려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섣불리 엄두를 못 낸다.
아무리 정교하고 완벽한 학설이라도 보통사람들이 모여사는 속계에 닿으면 전혀 엉뚱한 반응을 일으킬 수가 있다. 참신하고 기발한 것일수록 그렇다.
경세제민의 학문이라 할 경제학에 있어도 무수한 신학설들이 나왔지만 실제 쓰인 것은 매우 드물다.
학설은 천재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을 펴는 것은 정치이기 때문이다. 케인즈의 완벽한 이론도 그것이 실험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고 프리드먼은 후진국 칠레에 가서나 한번 임상실험을 해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그런 면에선 매우 행복인 것 같다. 기발하고 참신한 학설을 펴볼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의 의견이 크게 경청되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못해보는 거대한 실험을 한국에선 해볼 수가 있다.
그것도 조심스럽게 단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 3천9백만명에 7백억달러 규모나 되는 국민경제를 벌컥 뒤집어 놓으면서 할수 있으니 케인즈나 프리드먼이 크게 부러워할만하다.
민간에 돈이 많은 것 같으니 그것을 한번 모아보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통화개혁을 한번 해보고 사채가 많아 경제가 잘 안된다 싶으면 사채동결을 해볼 수도 있다. 부가가치세라는 것이 매우 좋은 것이라 생각되면 전광석화같이 실시하고 지하경제를 일도양단할 금융개혁조처도 해볼 수 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긴축을 강행했다가 어느날 갑자기 확 풀 수도 있다.
빗발치듯하는 아우성에 오불관언, 고금리를 지속하다가 물가지수가 떨어졌다 하여 벼락같이 금리를 내려볼 수도 있다. 어제나 오늘이나 속세의 사람들은 별다름이 없는데 고매한 이론만은 운상에서 신출귀몰하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물가가 오르니 긴축의 고통은 당연히 참아야 한다는 이론을 펼 수도 있고 요즘 돈은 「금융구조의 개혁」때문에 많이 늘어도 물가는 안 오른다고 우길 수도 있다.
60년대엔 「몸이 커지면 옷도 커져야 한다」는 소박한 논리로 돈 느는 것을 설명하더니 70년대엔 「통화수준의 조정」이라고 약간 고급이론을 펴고 최근 들어선 「금융구조의 개혁」이니 「마셜·K의 국제적 비교」니 하고 첨단이론들이 횡행하고 있다.
요즘은 돈이 갑자기 늘어도 물가가 안 오를 수 있다는 경제적 실험을 하고있는 셈이다.
이론대로라면 물가는 까딱없이 경기만 올라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벌써 아파트를 비롯한 부동산투기의 조짐이 일어나고 있다.
물가지수는 계속 안정되고 있으나 아파트 프리미엄이나 전세값은 폭등하고 있다.
복부인들이 다시 발호하여 그동안 애써 다져놓은 한자리 물가분위기가 일거에 흩어지려하고 있다. 이론은 고매한데 속계는 오욕이 넘치니 이론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이론을 낸 사람들이야 잘해보려고 했겠지만 임상실험을 당하는 쪽은 죽을 지경이다.
이론쪽에 옥의 티가 있었는지 고매한 이론을 우중들이 미처 못 소화하는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최우석 부국장 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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