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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분한 역사? 게임에 빗대 설명하니 아이들 눈이 반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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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중 박병민 교사(가운데)가 질문하는 학생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김경록 기자

‘역사=암기. ‘ 많은 학생의 머릿속엔 자리잡고 있는 등식이다. 수많은 왕 이름과 시대별 사건 사고를 연도까지 줄줄 꿰고 있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암기 못해서 역사 공부 싫다”며 역사를 지레 포기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경기도 부천고 박병민(31) 교사는 “역사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내 삶을 비춰보는 인문학”이라며 “암기가 아닌 맥락 이해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남고 교실에서 별다른 멀티미디어 도구도 없이 이런 역사적 맥락을 설명할 때 졸지 않고 경청하는 학생이 얼마나 될까.

박 교사의 수업 노트(위)와 칠판 판서 내용.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때는 지도를 그려 주변국 상황까지 맥락을 짚어가며 알려준다.

부천고를 찾은 지난달 31일, 1학년 13반 교실에서는 한국사에서 가장 어렵다는 ‘일제 강점기 항일 투쟁의 모습’ 관련 수업이 진행 중이었다. ‘황국신민화’ ‘복벽주의’ ‘산미증식계획’ 등 골치아픈 어휘가 줄줄이 등장하는 데도 학생들은 졸기는커녕 박 교사 질문에 재깍재깍 답하는 것도 모자라 서로 손을 들며 “저 좀 발표 시켜주세요”를 외쳤다. 이날 엎드려 자는 학생은 딱 한 명, 운동부 소속이었다.

 동영상을 보여주거나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는 화려함은 없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학생들이 삼삼오오 책상을 맞대고 모여 앉아 있는 정도였다. 수업 시간 내내 박 교사는 칠판 앞에 서서 지도를 수차례 그렸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책상 배치만 다를 뿐 전형적인 주입식 강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비결이 뭘까.

그는 “1~2년 스마트 수업을 하면서 이게 학생을 위한 게 아니라 교사 자신의 만족을 위한 보여주기식 수업이라는 생각에 회의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수업 시간만이라도 스마트기기를 내려놓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대화하는 시간을 늘리는 편이 낫다”고 결정한 뒤 2년째 강의와 모둠활동을 결합한 현재의 수업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강의식 수업이라고 해서 교과 내용만 줄줄 읊는 건 결코 아니다. 설명할 때는 반드시 게임 등 아이들에게 친숙한 비유를 들고, 학생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예컨대 ‘일제 강점기에 해외에서 항일 투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전달할 때는 “여러분, 게임할 때 본진이 무너지면 어떤 전략을 세웁니까”라는 질문을 던져 주의를 끈다. 게임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학생들도 배시시 웃으며 “기지를 만들죠”라고 답했다. 박 교사는 이런 대답이 나온 후에야 “일제 시대 때도 마찬가지죠. 당시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이라는 무자비한 통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국내 본진이 무너져 해외에 기지를 건설했다고 보면 됩니다”는 설명을 이어간다.

 다른 과목도 자주 언급한다. 독립운동 노선이 강경해진 이유에 대해 “뉴턴 제3법칙, 즉 작용과 반작용은 과학뿐 아니라 인간의 삶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라며 “침략이 있으면 저항이 따르고 억압이 강하면 반발도 강해진다”며 물리학 이론을 끌어와 풀이해줬다.

 즉흥적인 것 같지만 실은 철저하게 계산된 멘트다. 박 교사는 “이런 비유 하나도 수업 전 미리 꼼꼼하게 준비한다”고 말했다. “이걸 교육학에서는 ‘교수 내용 지식’이라고 해요. 교사가 알고 있는 걸 학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비유나 유추를 해야 효과적이라는 거죠. 여긴 남학교라 주로 컴퓨터 게임이나 야구 경기, 과학 이론에 많이 빗댑니다.”

 이날 수업 관련 설명이 끝나자 박 교사는 직접 제작한 유인물을 나눠줬다. 학생들끼리 모둠활동을 통해 유인물을 채워가는 거다. 질문은 방금 전에 박 교사가 설명한 내용이거나 교과서 주요 내용이다. 교과서 내용을 옮겨 적어야 하는 질문 옆에는 페이지 수까지 적혀있다. 유인물 마지막 질문은 ‘내가 만약 이 시기 독립군이었다면, 복벽주의(고종황제를 복위해 군주국가를 세우자는 생각)와 공화주의(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이념) 중 어느 쪽을 선택했을까’였다. 박 교사는 “유인물을 만들 때 빈칸 채우기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내용만 적도록 하고 마지막엔 논술형 문제를 제시해 학생의 생각을 정리하게 만든다”고 했다.

 박 교사는 수업 시간 내내 경어를 썼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 배운 ‘신민회’ 기억 납니까” “독립운동하는 목적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겠죠, 그런데 되찾은 나라를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는 독립운동가마다 달랐습니다”처럼 줄곧 정중한 어투다.

 박 교사는 “원래는 수업 분위기 흐트러지는 걸 못 보는 성격이라 애들한테 무섭게 욕도 하는 등 생활지도도 엄격하게 했다”고 말했다. 수업 스타일을 확 바꾼 건 “교사가 무서우면 학생들이 집중하는 척만 할 뿐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뒤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존경하는 선배 교사의 조언, 교육학 관련 책을 많이 읽고 느낀 것을 실천하려 한 거죠.”

 아무리 수업 전에 이렇게 좋은 마음을 먹는다해도 수업 중 돌출 행동을 하는 등 방해하는 학생이 나오면 참기 어렵지 않을까. 박 교사는 “남자 고등학교의 특성상 거친 면이 있다”며 “전에는 힘으로 제압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잠깐 밖으로 불러 다독이고 진정시키는 등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학생을 존중하는 태도에 학생들은 당연히 호감을 표시한다. 1학년 김민우군은 “중학교 내내 수업시간에 ‘야’ ‘너’ 이렇게 불리다가, 박병민 선생님이 ‘여러분’이라고 깍듯하게 불러주니 처음엔 너무 어색했다”며 “하지만 선생님이 존중해주니 나도 수업시간에 말이나 행동을 더 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3학년 김주범군은 “질문하기가 편하다”는 얘기를 했다. “선생님이 늘 웃으며 대해주고 아무리 간단한 걸 물어도 무안을 주기는커녕 친절하게 답해줘 역사 과목 자체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업 시간에 질문이 많은 편이었다. 이날 한 학생이 “간도는 ‘북간도, 서간도’로 나누는데, 만주는 왜 ‘남만주, 연해주’로 나누냐”고 물었다. 박 교사는 연해주의 지도상 위치와 한자 표기 沿海州 를 가르쳐 주며 “남만주는 방향을 기준으로 부른 것이고, 연해주는 바다(海)와 연(沿)해 있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차분히 설명했다.

 박 교사는 50분 수업을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눈다. 지난 수업 복습 겸 대단원 개괄에 10분, 진도에 맞춘 주요 내용 설명에 20분, 모둠학습을 통한 유인물 정리와 발표에 20분씩 쓴다. 그는 “교사가 급한 마음에 수업 시작하자마자 진도부터 나가면 학생들은 지금 배우는 내용이 역사라는 큰 그림 속 어디에 해당하는지, 이걸 왜 배우는지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된다”고 말했다. 본격적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대단원 전체를 조망해주며 그날 배울 내용에 대한 나침반을 먼저 쥐어준다는 얘기다.

 이런 방식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학생들은 “역사에 눈을 뜨게 해준다”고 입을 모은다. 1학년 김태훈군은 “역사 속 사건끼리 어떤 연관이 있는지, 이게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알게 되니까 교과서를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3학년 최승재군은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을 자꾸 나에게 대입하는 습관이 생기다보니, 논술을 할 때도 역사적 예를 많이 들게 되고 깊이있는 해석을 하게 된다”며 “단순히 한 과목 점수를 잘 받게 되는 걸 떠나 입시, 더 나아가 삶에 두루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박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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