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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골목「런던」(18)계층 간의 격한 적대감주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영국의 실업자수가 세계 대공황이래 최고 기록에 육박하고있던 2년 전, 중부공업지대의 실업자들은『일자리를 달라』는 구호를 내걸고 국토종단 맹진을 한 적이 있다.
맨체스터에서 시작해서 버밍검을 거쳐 런던 근교에 도착했을 때는 곳곳에서 합세한 실직자들로 이 대열은 거의 1천명가까이로 불어났다.
이들은 윈저성을 지나면서 진로를 바꾸어 명문고등학교 이튼을 통과하기로 결정했다.1년 학비가5백 만원이나 되는 이 학교의 부유층 자제들에게 실직자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보이려는 의도와 함께 이들의 양심을 건드려 보려는 도전적 장난기도 가미된 진로변경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의도한 이튼 교정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충돌을 우려한 학교당국이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학생들을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은 『직업을 달라』는 구호를 격렬히 외쳐 댔지만 학생들은 커튼 뒤에 숨어서 조용히 바깥을 엿볼 뿐이었다.
이튼에서의 이 어색한 만남은 지금도 영국사회의 고질이 되고 있는 상류층과 근로계층 사이의 적대감점을 상징한다.
이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영국의 국토는 하나지만 민족은 상층계급이란 민족과 하층계급이란 민족 2개가 있다고 개탄하고있다.
우선 두 계층 간에는 말이 다르다. 한국에서 경상도·전라도 방언이 있듯이 영국에서는 상류층 방언, 노동계층의 방언이 다르고 심지어 이튼 고등학교 방언, 해로 고등학교 방언이 다르다.
거기다가 옷과 넥타이가 다르고 먹는 음식·술, 각각 즐기는 스포츠도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면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아도 서로의 출신계층을 알 수 있게 된다. 구멍가게 집 딸로 태어났던 「대처」여사도 상류층 발음을 새로 배워서 정계에 진출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재산의 유무로 생겨났고, 교육의 기회 불균등으로 유지되어 왔다.2차대전후 교육제도의 개혁으로 계급의 현격한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지만 성과가 없고, 요즘은 오히려 계층간의 적대감이 더 심화되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옥스퍼드의 뉴필드대학 사회이동연구반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국사회에는 1대2대4의 「상대적 희망률」이란 것이 작용하고 있다. 이 비율은 노동계층의 자제가 관리층 직업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을1로 잡을 경우 중산층 자제는 그 두배, 상류층 자제는 그 4배의 확률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계수가 보여주는 것은 두개층 사이의 벽을 뛰어 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적대감은 심화되는 것이다.
영국의 부자가 자신의 부를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것을 천박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은 영국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겪어온 근로계층의 이 적대감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예컨대 공장주는 공장을 찾아갈 때 롤스로이즈를 갖고 있으면서도 싸구려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예사다.
부유층의 짐들이 대개 막다른 골목 안에 몰려있고 접근로는「사용도로」로 만들어 외부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놓은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일 것 같다.
이런 적대감 때문에 영국의 노사관계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더 악생이란 점이 자주 지적된다. 영국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영국이 파업으로 잃는 총조업시간이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 적다는 점을 열심히 강조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경우 파업이 대개 정기 봉급인상일을 앞두고 실시되기 때문에 사업주는 이걸 예상해서 미리 재고를 쌓아 놓고 예상되는 파업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데 비해 영국의 경우는 사업주가 가장 취약한 때를 꼴라 최대의 피해를 주는 방법으로 파업이 실시된다. 그래서 조업시간과 관계없이 피해가 크다.
18세기에 시작된 악명 높은 「인클로셔」로 소작인을 도시근로자로 내몬 이래 굳어진 계층간의 장벽은 유럽 각 국에서처럼 혁명이나 이와 비슷한 사회개혁을 겪지 않음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처럼 혁명을 겪지 않고 산업화를 이룬 것을 큰 장점으로 생각했던 일부 영국인들은 그 장점 속에 계층 간의 적대감이란 암세포를 안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파업을 무마하는 협상이 진행중인 자리에 이튼 고등학교식 발음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협상은 깨어지고 파업은 더 격렬해 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병은 근로자들의 파업성함에서 나오고 파업성함은 근로조건뿐 아니라 3백 여년동안 산업시대를 겪으면서 아직도 견고한 계층 간의 장벽에 뿌리를 내려고 있는 것이다.<장두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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