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 포럼

싱가포르에 배울 것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싱가포르와 한국을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서울(607㎢)보다 조금 크고 부산(750㎢)보다 작은 685㎢의 면적에 인구 420여만 명의 도시국가를 한국과 직접 비교할 수 있느냐는 얘기다. 하지만 면적의 크고 작음, 인구의 많고 적음이 경제 발전이나 국가 경영의 난이도 기준이 될 수는 없다. 1965년 수백 달러의 1인당 국민소득을 89년 1만546달러로, 94년 2만1096달러로 늘린 싱가포르의 '적도의 기적'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부분은 적지 않다.

▶ 이세정 정책기획부 차장

며칠 후인 9일은 싱가포르 독립 40주년 기념일이다. 싱가포르의 두 번째 독립이다. 하지만 리콴유(李光耀) 당시 싱가포르 총리는 독립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사실 우리는 독립을 원한 적이 없었다"며 "싱가포르가 독립국가로 살아남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고 회고했다.

싱가포르는 59년 자치령 형태로 영국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를 우회하는 무역정책을 채택하면서 중계무역항 중심의 싱가포르 경제는 심각한 지경에 빠졌다. 견디다 못한 싱가포르는 외무와 국방을 말레이시아에 넘기는 조건으로 63년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했다. 하지만 숱한 정치적 갈등 끝에 65년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사실상 축출당한 게 싱가포르의 두 번째 독립이다. 기뻐할 수만은 없는 독립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한 싱가포르는 적도의 기적을 일궈냈다. 적도상에서 산업화에 성공한 지역은 싱가포르밖에 없다. 일년 내내 뜨거운 태양 아래 살면서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냉방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싱가포르는 없었을 것이라며, 싱가포르를 '에어컨의 나라(air-conditioned n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항상 한국보다 20여 계단 이상 위를 차지하는 싱가포르의 경쟁력 비결로 흔히 ▶정치적 안정 ▶깨끗하고 효율적인 정부 ▶노사 평화 ▶숙련된 노동력 ▶현대적 인프라 등을 꼽는다. 한국도 노동력과 인프라에서는 싱가포르 못지 않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싱가포르에 한참 뒤져 있다.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국민소득 1만 달러 벽을 넘어선 한국인과 한국 기업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체제가 돼버린 현 상황에서는 정치권과 정부, 노사 부문의 경쟁력은 곧바로 국가경쟁력을 좌우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과 정부, 노사 부문의 열악한 경쟁력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실정이다. 싱가포르의 영재 위주 교육, 공무원 우대 정책 등도 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한국이 싱가포르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보다도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실용주의와 합리주의 아닐까 싶다. 올 초 싱가포르 정부는 40년간 유지했던 도박산업 금지정책을 없애고 카지노 개설을 허용하기로 했다. 리콴유 전 총리가 "내 부친도 도박광이어서 도박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국가 차원에서 도박 산업을 허용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를 낳는다"며 총대를 멨다고 한다.

118년 역사의 래플스 호텔이 미국 사모펀드에 팔린다는 소식도 놀랍다. 유명한 칵테일 '싱가포르 슬링'의 탄생지며, 서머싯 몸이나 찰리 채플린 등 세계 명사들이 즐겨 찾던 싱가포르의 상징적 호텔이 바로 래플스 호텔이다. 이곳의 실질적 주인은 싱가포르 국영기업인 테마섹이다. 매각 이유는 간단하다.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을 정도로 호텔 규모를 키우기 힘들므로 팔겠다는 것이다. 한국 공기업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클린 싱가포르란 이미지와 달리 싱가포르 외곽 겔랑 지역에는 사창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등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곳은 정부의 엄격한 관리를 받고 있다. 공창(公娼) 논의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전국 곳곳이 향락산업에 물들 때까지 방치하다가 지난해 9.23 성매매 특별법이란 극단적 조치로 시끄러웠던 우리 모습과 대조적이다.

한국이 실용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당장 배 아픈 것을 해소하는 데 급급하고, 미래보다 과거에 집착하는 동안 싱가포르는 따라잡을 수 없는 곳까지 도망갈 것 같아 불안하다.

이세정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