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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③문화] 25. 저항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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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아한 목청으로 ‘아침이슬’을 부른 가수 양희은의 모습은 70년대 저항문화의 아이콘이었다.

▶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 시의 검열과 시집의 판매금지, 연행, 투옥이라는 고난의 여정을 거친 시인 김지하는 한국 저항문화의 대표적 이름이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지난 5월 2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홀에서는 통기타 반주를 곁들인 독일어 버전의 ‘아침이슬’이 울려퍼졌다. 한국인의 애창곡이 된 ‘아침이슬’을 부른 사람은 독일의 시인 겸 가수인 볼프 비어만이었다.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방한한 볼프 비어만은 “2년 전 독일에서 김민기를 만나 이 노래를 알게 됐다”며 “한국이 통일되는 날, ‘아침이슬’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옛 동독 시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 시를 쓰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볼프 비어만은 당시에 자신이 불렀던 ‘격려’라는 노래를 불러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 이번에는 케냐 출신의 망명 작가 응구기와 시옹오가 “한국의 시인 김지하의 ‘오적’에서 영감을 얻어 평론집 『작가와 정치』, 소설 『십자가 위의 악마』를 썼다”고 말해 관심을 모았다. 1973년 『민중의 외침(Cry of the People)』이란 김지하의 영역 시집을 접하고, 이야기·노래·속담 등 구전전통을 활용해 아프리카 민중의 사회적 저항, 정치적 단합을 촉구하는 민중적 다성성(多聲性)의 글쓰기를 전개했다는 것이다. 실제 『십자가 위의 악마』라는 소설에는 ‘누가 누가 더 악마적인가?’를 경쟁하는 ‘도적들’이 등장한다.

‘오적’과 ‘아침이슬’은 이제 한국인만의 문화가 아니다. ‘금지’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한국 저항문화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가치의 신장에 기여한 인류의 문화적 보배가 되었다.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저항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스스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87년 6월항쟁 이후 제도화 과정을 겪으면서 문화 가치 확산과 행정의 민주화라는 가시적 성취를 얻어냈다. 전사회적으로 탈권위·민주화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사회 재조직화(reorganization)’가 진행되고 있다. 예술에서 좌우파를 따지는 일은 옛말이 되어버렸고, 보수와 진보 논란 역시 더 이상 정치적 색깔 시비를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 문화는 인간이 그 자체로 되는 존재라는 특유의 자율성을 표현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더 이상 역사의 가역반응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한국 민주주의는 공고해지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제는 ‘문화사회(cultutal society)’의 비전이 중요해졌다.

이런 문화적 과정이란 주체의 자기 정립을 요구했다. 70~80년대 저항문화(counter-culture)와 청년문화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한국의 경우 ‘청년문화=저항문화’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소위 ‘엇섞임’이라는 미묘한 균열이 존재한다. 김지하 시인은 두 문화의 ‘섞임’을 위해 노력한 문화인이 영화감독 하길종과 김민기였다고 회고한다. “김민기가 가야금과 거문고를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잘 안 돼. 그래서 그냥 기타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지.” 비록 형식과 지향점은 사뭇 다를지 모르지만, 70년대 이후 본격 형성된 두 하위문화는 ‘반(反)파쇼’라는 공통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찾기 위해 연대했다.

장발,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는 60년대 후반 서구의 청년문화의 자장권(磁場圈)에서 비롯됐다. 청년문화는 포크 가요와 록 뮤직 등 특히 대중음악 부문에서 자신의 문화를 그려냈다. 트윈 폴리오, 한대수, 김민기, 양희은, 양병집의 포크 음악과 신중현의 록 뮤직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김민기가 만들고 양희은이 노래한 ‘아침이슬’(1971년)의 등장은 청년문화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지하는 “죽음과 고문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저항이었고 대안이었다”라고 평했다. 청순한 음색과 중성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 여성보컬 양희은은 포크 이념을 표상했다. 그는 명동 청개구리집에서 데뷔한 뒤 빅살롱 코스모스 성전, 젊은이의 성지 오비스캐빈 등 명동의 다운타운을 누비며 한국 모던 포크의 상징으로 군림하게 된다.

미국 유학파 출신인 한대수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의 노래 ‘하루 아침’(1974년)의 경우 새마을운동에 대한 삐딱한 야유가 묻어난다. “배는 조금 고프고 눈은 본 것 없어서 / 명동에 들어가 아! 국수나 한그릇 마시고 / 빠문 앞에 기대어 치마 구경하다가 / 하품 네 번 하고서 집으로 왔다.” 70년대 대표적 관제(官製) 히트곡 ‘새마을노래’와 비교해 보라. 그러나 이 노래는 제1집 ‘멀고 먼 길’(1974년)에는 수록되지 못한다. ‘정치적’ 검열을 염려한 탓이다. 결국 89년판에야 수록될 수 있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창남은 “당시의 포크음악은 감각적인 차별성을 드러내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긴급조치로 대표되는 유신체제는 팝음악의 발랄한 활동조차 국민총화에 역행하는 불온성으로 치부했다. 75년에는 가요 심의와 규제 조치, 그리고 대마초 가수 일제 검거를 통해 청년문화의 저항성을 거세했다. 왜색, 월북, 반체제, 풍자, 미풍양속 저해라는 이유로 입을 막은 것이다.

저항문화의 사정은 더욱 심했다. 신체적인 위해(危害)는 물론 목숨조차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의 풍자 저항시 ‘오적’이 발표되면서 촉발된 ‘오적 재판’은 시예술 혹은 예술가의 상상력을 감옥에 가둔 ‘한국적’ 반달리즘의 사례였다. 김지하의 장광설이 마냥 과장이었는가. 김지하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중정 요원들이 서울 동빙고동을 현장 조사해, 당시 모 권력자의 집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된 사실을 알아냈다”면서, 되레 “김지하가 애국자야!”라는 칭찬(?)의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김 시인은 또 “당시 ‘사상계’에 실린 삽화에 ‘지하’라는 사인이 적혀 있지만, 실은 판화가 오윤이 그렸다”고 덧붙였다.

70~80년대는 ‘금지’의 시대였다. 시인 김지하는 70년대 저항문화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수난 속의 축복’과도 같은 존재였다. ‘오적’사건 이후 시인은 검열, 판매금지, 연행, 투옥이라는 고난의 여정을 건너야 했다. 오늘의 작가들이 차라리 이념 검열이 존재했던 70~80년대가 행복했노라고 자조적으로 푸념하는 것에 비한다면 거대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70년대 청년문화와 저항문화는 이후 대중문화의 주류적 경향에 저항하는 두 흐름을 형성했다. 이 흐름은 훗날 ‘1980년 광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맞아 운동권문화(대학) 또는 민중문화(문학)로 심화 확산되는 전이 과정을 밟게 된다. 민중문화열은 하나의 현상처럼 번졌다. 수천 곡이 넘는 민중가요가 창작되었고, 문화운동론에 대한 갑론을박 논쟁 또한 가열되었다.

재미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불가능한 ‘자유’를 꿈꾸는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사람이 사는 삶에 문화가 기여해야 한다는 믿음은 쉽게 부정될 수 없으리라. 80년대 문화는 그러한 믿음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는 세상”(문익환)을 향한 해방의 서사를 구현하고자 했다.

고영직(문학평론가)

'골방의 문화’ 만화
엔터테인먼트 주역으로

1960년대로 접어들며 만화방이 확산돼 한국 만화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멋진 뒷발차기의 영웅 라이파이나 고독한 카리스마의 훈이, 이름처럼 친근한 두통이 등 친근한 캐릭터들이 독자와 조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만화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만화방’이라는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연계되는, 더도 덜도 아닌 딱 그 수준에서, 유폐되듯 골방에 갇혀 있었다. 골방에 갇혀 있는 만화에 ‘감시’는 자연스러운 수순. 68년 8월 31일 정부는 한국아동만화윤리위원회를 조직해 원고를 ‘심의’하기 시작했다. 권당 130쪽 이상이어야 하고, 권수는 세 권 이하로 제한됐다.

골방에 유폐된 만화는 아동잡지와 신문을 딛고 탈출을 시도하기도했다. ‘새소년’(1966년 창간),‘어깨동무’(1967년),‘소년중앙’(1969년)의 잡지 트로이카 시대가 개막되었고, 별책부록으로 제공된 만화는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만화방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났다 해도 만화의 유폐는 끝나지 않았다. 어린이달인 오월이면 만화가들이 불량만화 추방 캠페인을 벌여야 했던 70년대, 만화는 문화적 금치산자에 불과했다.

절망과 공포의 80년대, 많은 사람이 장편 만화 주인공들의 승리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수십kg을 감량한 강토(허영만의 ‘무당거미’)의 투지에, 지금 보면 거의 스토커에 가까운 엄지를 향한 혜성(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의 질긴 집착에도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만화방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했고, 전화번호부 두께만한 만화전문 월간지 ‘만화보물섬’도 창간했다.

90년대가 되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만화왕국의 적자(嫡子)들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유로운 그들의 상상력은 위대했다. ‘슬램덩크’와 ‘드래곤볼’은 우리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오랜 시간을 끌어온 골방의 문화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주역이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되자, 디지털 시대의 인류는 만화에서 디지털 시대의 언어를 발견했다. 문자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오는 이미지의 힘으로, 만화는 가상의 공간을 장악하고 현실의 엔터테인먼트에 자양분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영상물, 게임, 캐릭터가 만화에 뿌리를 대고 자라나고 있다. 놀라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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