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일본 ‘혐한 서적’ 출판 봇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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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세계가 경멸하는 불쌍한 나라.” “전 세계적으로 조롱 받는 한국의 반일운동.” “매춘 수출, 강간 대국.”

 올해 초 일본에서 10주 연속 정치·사회 부문 판매 1위를 기록한 혐한 서적 『매한론(?韓論·어리석은 한국)』은 한국을 이처럼 설명하고 있다. 지지(時事)통신 서울특파원 출신인 저자 무로타니 가쓰미(室谷克實)는 지난해 발표한 『악한론(惡韓論)』으로 이미 혐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도 한국을 “화려한 외면에 비해 실체는 빈약하고 부실하기 짝이 없다”, “거짓말과 폭력만 행사하는 누가 봐도 나쁜 나라”라고 묘사한다.

올해 새로 출간된 일본 혐한 서적들의 표지. 이들은 책 제목·표지에서부터 ‘반일 한국, 극도로 위험한 정체’ ‘한국과 엮이면 불행해지는 K법칙’ ‘테러리스트 안중근의 캐릭터 상품 분석’ 등 혐한 코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사진 최재천 의원실]

 혐한(嫌恨·미워하고 원망한다)이 아닌 ‘한국을 증오한다’는 뜻의 혐한(嫌韓)은 올해 일본 출판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키워드 중 하나로 꼽힌다. 상반기 논픽션 부문에서 『매한론』 외에 『거짓말투성이의 일·한 근현대사』 『왜 반일(反日) 한국에 미래가 없는가』가 10위권에 들었다. 대표적 혐한 단체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의 사쿠라이 마코토 회장이 9월에 펴낸 『대혐한시대』도 하반기 베스트셀러다. 혐한 출판물이 최근 부쩍 늘어난 것은 출판업계가 혐한이라는 자극적인 코드를 출판 불황 타개책으로 택했기 때문이다. 과거사를 부정하며 극우로 치닫고 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우경화도 혐한 열풍에 한몫 한다. 과거 일부 극우 보수층에게만 먹혔던 혐한 출판물은 일본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지난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일본 혐한 출판물 전시회’에는 최근 출간된 혐한 도서·잡지 50여 종이 공개됐다. 과거에는 일본의 과거사 왜곡이 주된 내용이었던 혐한 출판물의 소재 범위가 넓어졌다. 지난 5월 출간된 『한국인에 의한 침한론』은 세월호 사고와 한국인들 반일 감정의 공통점을 분석하며 ‘수많은 병이 만연한 한국’을 강조한다. “‘나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죽이는’ 사고방식으로 세월호 사고 책임을 회피한다”며 “집단 편집증적 사고를 가진 국가에 먹히는 약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조롱한다. 순수 한국인이라는 저자는 책 후반부에서 “한국인은 오랫동안 ‘우리는 피해자’라는 교육을 실시해 왔다”며 “그 결과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불신 사회”라는 결론을 내린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도 단골 소재다. “한국에서 점점 과열되는 일본 비판의 선두주자는 반일노선에 돌진해 ‘폭주 아줌마’로 야유 받는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일본을 험담하는 외교전략을 펼치고 있다.”(『반일 한국, 너무 위험한 정체』 중에서)

 “매번 일본인에 대한 분노만 표출하는 박 대통령.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5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재원이 이런 수준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다.”(『박근혜 한국 대통령, 왜 나는 ‘반일’인가』 중에서)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인 아마존닷컴 일본판에 ‘한국(韓國)’을 검색하면 첫 페이지에 나오는 책 25권 중 17권이 반한(反韓) 성향의 책이다. 지난 5월 출간된 『한국과 관계되지 마라!』엔 이 책을 옹호하는 리뷰 99개가 달려 있다. 유튜브에서 ‘재미있는 반일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저자는 ‘비(非)한국 3원칙’(돕지 않고, 가르쳐 주지 않고, 관계하지 말라)을 주장한다.

 오래전부터 반한 감정을 조장해온 일본 주간지 ‘프라이데이’는 지난 9월 5일자에 ‘너덜너덜 한국, 박근혜 대통령 소문의 남자와 밀회 의혹으로 일본에 화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몇 장만 더 넘기면 낯 뜨거운 성인 화보가 등장한다.

 출판물 외에 헤이트 스피치(증오 발언)도 급증하는 추세다. 도쿄·고베 등 대도시에선 매주 재특회가 주도하는 혐한 시위가 열린다. 2011년부터 올해까지 도쿄에서 열린 혐한 시위는 400건에 육박한다. 이들은 ‘한국인을 비틀어서 죽여야 한다’ ‘한국인은 바퀴벌레, 기생충에 불과하다’ 등의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온다.

 지난 8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혐한 단체들의 발언·행동은 인종차별이며 이를 금지하는 법과 형사처벌 규정이 필요하다”며 일본 정부에 시정을 권고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미지근한 반응이다. 지난 7월 오사카 고등법원이 혐한 시위를 한 재특회 회원들에게 “1200만 엔(약 1억2000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1심 판결을 확정 지은 게 유일한 법적 판결이다.

 국민대 이원덕 교수는 “일부 참의원 사이에서 혐한 금지를 입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일본 국내에서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게 현실”이라며 “우리 정부도 일본 정부에 금지 입법을 촉구하고, 일본 주류 지성인에게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호소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S BOX] 민족·인종 차별 반대 ‘반혐한’ 움직임도 활발

일본 내에서도 혐한 열풍에 대해 반대하는 ‘반혐한’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2일 도쿄 시내에서는 혐한 시위 및 민족·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노헤이트(no hate) 도쿄 대행진’ 행사가 열렸다. 재일 외국인을 비롯해 지식인·정치인 등 1000명이 ‘차별 없는 세상을 아이들에게’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신주쿠 거리 7㎞를 행진했다. 이들은 재특회 등 극우 단체가 시내 곳곳에 써둔 혐한 낙서를 지우는 행사도 열었다. 앞서 지난 7월 오사카에서 열린 반혐한 시위에도 시민 2000명이 참석해 “국가·민족 등 태어날 때부터 가진 속성을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자성의 목소리는 출판업계에서도 나온다. 20~30대가 주축이 된 ‘배외주의와 헤이트 스피치에 가담하지 않는 출판 관계자 모임’은 혐한(嫌韓)·혐중(嫌中) 열풍을 반성하고 이러한 서적의 위험성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아사히(朝日)신문 등 일본 언론들도 “정치권부터 국내외에 혐한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며 혐한 세력들을 압박하고 있다. 늦게나마 정치권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일본 집권 자민당은 지난 8월 혐한 규제 법률을 준비하는 태스크포스(TF)를 꾸리겠다고 발표했다.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초당파 의원 모임을 결성했던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 민주당 참의원은 지난 2일 “이달 중으로 인종차별 철폐 기본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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