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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약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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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교과서의 내용
「대규모의 토지조사에 의한 토지소유권의 확인을 하고…광대한 토지를 관유지 (官有地) 로 접수하였다.」<삼성당「일본사」2백 64페이지>>
『단적인 예를 하나만 들까요. 저들이 설립한 동양척식회사가 19l0년 합방당시 갖고있던 땅이 1만 정보 남짓했어요. 그게 소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이듬해인 1919년에는 7만 8천 5백여 정보라는 엄청난 규모로 확대됐어요.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철저한 토지약탈과정을 말해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요.』
강단을 떠난 요즘도 일제 하 농민사를 연구중인 고승제 박사 (66·경제사).
그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한반도를 그들의 식량기지화 하기 위한 식민지 약탈체제의 정비사업이었다며 그 과정의 교활함을 생각할 때 접수 운운은 가당치도 않다고 논박한다.
『일본의 경제침략은 개항과 더불어 시작됐어요. 토지조사사업도 이러한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비교적 오래된 일이고 그 과정이 장기간에 걸쳐 단계적으로 교활하게 추진됐기 때문에 일제 말의 강제징용, 한글사용 금지처럼 즉각적인 고통을 수반한 저들의 침략정책과는 다른 일면을 갖고 있어요. 그러나 한국민의 근간을 이루는 농민의 생존기반을 박탈하고 철저한 경제적 예속화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그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어요.』
토지조사사업은 공식적으로는 한일합방 2년 후인 1912년 8월 토지조사령과 동 시행규칙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시작돼 1918년 11월에 끝난 토지소유권·가격·지형 등에 관한 조사사업.
그러나 일본의 토지약탈작업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되어왔다.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개항장을 중심으로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조약상 외국인의 토지매입은 개항장 주위 10리 이내로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인의 명의를 빌리는 등의 편법을 사용, 내륙의 농토매입을 불법적으로 확대해 나갔다.『물론 말이 매입이지 관전한 약탈이나 다름 없는 방법이었어요. 당시 도입되기 시작한 화폐경제로 말미암아 농촌에는 화폐기근화 현상이 심각했어요.
일본인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 농민들에게 고리대금을 해주고 담보로 토지를 저당잡아 이를 갚지 못할 경우 토지를 빼앗는 방법을 사용했어요.』노일전쟁 이후 한반도에 대해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 일본은 1906년 총독부를 설치하고 노골적인 토지약탈정책을 펴 나가기 시작했다.

<신고업무 거의 대행>
1906년 일본 농민의 조선이주를 꾀한다는 명목아래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정부로 하여금 1만여 정보의 전답을 자본금의 일부로 강제 출자케 했다. 또 같은 해 토지건물증명규칙, 토지건물전당규칙이 총독부에 의해 제정, 실시됐다.
그러나 일본인의 토지약탈작업은 물론 여기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즉 일본은 우리나라의 토지소유제도가 관행에 주로 의거할 뿐 명백한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1907년의 궁장토정리, 1909년의 역둔토조사 등이 그것.
토지조사사업은 바로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토지약탈과정을 매듭짓는 것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을 약탈로 밖에 규정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경작자이며 사실상 소유자인 농민을 배제한 채 일본인 또는 그들과 결탁한 일부 지주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과거 우리나라의 토지제도는 전통적인 왕토사상에 기반을 두어 왔어요. 형식적으로 국가는 전국토의 완전한 소유자였지요.
그러나 수백년이 지나면서 막대한 공전들, 즉 궁장토·역둔토 등의 실제소유권은 대대로 그 땅을 경작해온 농민들이 갖게 됐어요. 물론 그동안 농민들이 스스로 일구고 가꿔온 많은 농토들도 명의상 공전으로 되어있는 경우도 허다했구요. 일본은 이련 사실상 사유지인 농토까지도 국유로 편입, 막대한 토지를 약탈했지요.』
그 결과 11만 5천 정보의 역둔토와 궁전은 물론 그들이 황무지라 우겨 빼앗은 1백만 정보 이상의 진전, 기타 각 아문의 관전들이 국유지란 명목 아래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
토지조사사업의 약탈적 의미는 그들이 채택한 소위 신고제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하루아침에 소작농>
일본은 토지조사령 제4조에서『토지의 지주가 조선총독이 정하는 기간 안에 그 주소·씨명·소재·지목·자번호·사표·등급·결수 등을 임시토지조사국장에게 신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농촌의 상황에서 이러한 까다로운 사항들을 그것도 공고 후 30일 이내라는 짧은 기간에 신고하라는 저들의 방침은 단지 형식일 뿐 도대체가 그저 빼앗겠다는 의미 이상은 아니었다.
더욱이 신고서의 배포, 기입사항의 조사 등 주요업무는 총독부 당국자, 경찰관, 조사관, 지주 및 그가 선정한 총대 등에 의해 수행됐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민들은 아예 신고에서 배제된 상황이었다.
이렇게 당시 상황을 전혀 무시한 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빈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토지조사 사업기간 중 분쟁이 발생한 필지 수는 9만 9천여 필지로 전체의 약 0.5%.
대부분은「데라우찌·마사다께」(사내정의) 총독의 공문에서 보이듯『…필요한 경우에는 경찰에 명하여 될수있는 대로 미연에 방지할 것을 기하라』는 식의 억압에서 제대로 정당한 주장 한번 못해보고 증거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토지에 관한 권리를 잃은 경우가 허다했다.
토지에 관한 권리증서 같은 것이 명백치 않은 상황에서 군수의 증명을 근거로 소유권이 인정되자 일본인과 소수의 지주들은 일반 농민의 사유지를 불법신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문중토·동중토 등 단체소유지는 경작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모든 권리를 약탈당했다.
또 증거가 불충분하다 해서 엄연히 농민의 사유지이면서도 국유지로 약탈, 편입된 토지 및 임야 등도 엄청났다. 2만 5천여 정보의 토지, 1만 9천여 정보의 산림원야 등이 국유지로 약탈되고 소유가 인정된 것은 겨우 6백 10여 정보에 불과했다.
『토지조사사업의 목표와 내용은 그들이 자세히 기록해놓은 각종 통계만으로도 일목요연하게 나타납니다.』
토지조사사업 직후의 통계에 의하면 1909년 말 일본인 농업경영자 수는 6백 92명이던 것이 l915년에는 6천 9백 69명으로 늘었고 57개에 불과했던 1백 정보 이상 일본인대농장은 1911년∼20년 사이에 1백 43개로 늘었다. 더욱이 1918년 말 현재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 내 2백 정보 이상의 토지소유자는 한국인이 60명에 불과한데 비해 일본인은 무려 1백 44명에 달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1918년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조선총독부는 전체 농경지의 약 10%에 달하는 37만 7천여 정보의 경지와 전체 임야의 약 60%에 달하는 9백 26만 정보의 임야를 국유지란 명목으로 약탈했다.
이런 막대한 국유지는 다시 불하의 형식으로 동양척식 등 일본인회사와 농장으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토지에 대해 세습적 경작권을 갖고있던 농민들은 이제는 일본인지주의 의향 여하에 따라 언제나 토지로부터 쫓겨날 운명에 처하게 됐다.
더욱 그들이 징수한 소작료는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50∼80%라는 엄청난 비율이어서 농민들은 절대적인 빈곤상태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만주, 간도로 유랑길>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또 노예상태를 방불케 하는 고농으로 전락해가는 도정을 밟아갔고 생존기반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만주나 간도로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민을 예속화한 일본은 궁극적인 목표의 하나였던 일본 내 미곡문제 해결을 위해 막대한 쌀을 이출했다.
1912∼16년 평균 1백여만섬에 불과했던 쌀 송출은 1917∼21년에는 2백만섬을 넘어섰으니 생산량의 확대가 어려웠던 그 당시 현실에 비추어보면 한국농민을 더욱 굶주리게 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동양척식은 약탈결과로 얻은 막대한 토지에 1926년에 이르기까지 근 1만 가구의 일본인농민을 유치해온 데 비해 토지를 상실한 한국인은 1926년까지 29만 9천명이 만주등지로 떠나야 했다.『일제의 침략을 경험했던 동아시아국가들 중에서도 경제적약탈에 관한 한 우리처럼 철저히 피해를 본 나라는 없었다』고 강조한 고 박사는 일본을 똑바로 알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러한 비판과 노력이「일과성」의 흥분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박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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