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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논술 시대] 下. 외국의 논술 교육은 어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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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베를린 도심 슈판다우구에 사는 한어진(18)양은 요즘 방학인데도 저녁식사를 마치면 곧장 공부방으로 들어간다. 내년으로 바짝 다가온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아비투어 준비를 위해서다. 한양은 "시험에 떨어지면 유급해 재수할 기회가 딱 한 번뿐이고, 시험점수는 호적처럼 평생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긴장된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험공부를 위해 한양이 펼쳐든 책은 파트릭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Das Parfum)'였다.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 대목에선 참고서 격인 작품분석서를 뒤적인다. 그의 책꽂이에는 괴테의 대표작인 '파우스트' 등 다른 소설책도 눈에 띈다. 한양은 "논술시험은 문학작품에 대한 포괄적 지식과 수험생의 주관적 생각을 묻기 때문에 암기식 공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는 "최고의 준비방법은 다양한 책을 많이 읽는 것"이라며 "연간 평균 32권 정도를 수업시간에 다루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그 이상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비투어 시험은 4개 과목을 치른다. 독일어 시험의 경우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한 작품의 텍스트를 제시한 뒤 ▶300단어로 내용을 요약하고 ▶내용 분석에 관한 2개 항의 질문 ▶수험생의 의견을 묻는다.

답은 A4 용지 5장 분량의 논술형태로 작성해야 한다. 예컨대 뮌헨 지역 김나지움에서 치러진 독일어 시험은 '18세기 독일 문학이론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에 관한 논의가 차지하는 의의를 짧게 설명하라. 또 임의의 독일 희곡 작품을 들어 거기에 나타난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파리 15구의 뷔퐁고교에 다니는 박윤선(19)양은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이면 테르미날로 올라간다. 한국으로 치면 고3 과정이다. 내년 6월 치르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이 그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간이다. 박양은 이미 여름방학 중 공부해야 할 계획이 서 있다. 지난 6월 말 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각 교과 담당교사로부터 빽빽한 독서 리스트를 받았기 때문이다. 철학교사는 46권의 책 제목이 적혀있는 독서 리스트를 나눠줬다. 리스트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 괴테의 '파우스트', 사르트르의 '구토' 등 세계명작이 총 망라돼 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100% 논술 형식으로 치러진다. 하지만 교과과정에 논술을 가르치는 별도의 과목은 없다. 풍부한 독서와 평소 토론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자연스럽게 이를 대비하게 해준다. 수업시간에 교사는 학생에게 쉴새없이 질문을 던지고 학생은 이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 수업 자체가 논술식으로 진행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논리전개 과정에 충분히 인용하면서, 수업시간에 토론한 형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훌륭한 답안을 작성할 수 있다.

중학 3년 과정부터 파리에서 학교에 다닌 박양은 "이곳 시험은 고르기만 있는 한국 학교의 시험과 달리 답과 이유, 논의 과정을 모두 다 써야 한다"며 "평소 수업시간과 숙제를 통해 그런 식으로 공부하다 보니 적응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 대입시험에서 우리나라의 논술에 해당하는 것이 '에세이'다. 에세이는 내신.SAT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예비합격자가 대학교육에 적합한 사고력과 교양.감성 지능을 갖췄는지 최종 판단하는 기준이다. 하버드대의 경우 '나의 미래' '내 전공과 나의 진로' 같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주제를 400단어 이내로 적어내도록 하는 게 보통이다. 반면 매사추세츠 공과대(MIT) 같은 곳은 이공계에 집중된 특성을 살려 '진화론과 창조론' 같은 과학.공학적 주제를 출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에세이가 한국의 논술고사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벼락치기나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중.고 12년간의 독서 경험과 글짓기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적인 논리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학생 스스로 많이 읽고 써보아야 한다.

베를린.파리.워싱턴=유권하.박경덕.강찬호 특파원

런던대 재학 윤재원씨 "수학도 에세이식으로 풀어요"

"시험은 물론 과제도 논술(에세이)로 작성한다. 학교 교육이 사실상 논술로 시작해 논술로 끝난다."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에 재학 중인 윤재원(22.사진)씨. 중.고교 과정을 영국에서 마친 그는 "초등학교 과정에서도 객관식 시험은 없는 것으로 안다"며 이같이 말했다. 실제 그는 중학교 과정(GCSE.2년)에선 1년에 1000단어 분량의 에세이를 한두 개, 고교 과정(A-레벨.2년)에서는 1년에 3000단어(A4 용지 4~5장) 분량 에세이를 서너 개 작성했다고 한다. A-레벨 학년말시험 땐 5000단어 정도의 에세이를 썼다.

그는 "중학 수학 문제조차 '1부터 100까지 더하면 얼마인가. 어떤 과정을 거쳐 답을 구했는지 쓰라'는 식이어서 처음엔 굉장히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윤씨는 "특히 정규수업 외에 방과 후에도 원하는 만큼 충분한 지도를 받을 수 있다"며 "외국인은 매주 한 차례 별도의 에세이 수업이 있었다"고 말했다. 별도의 수업은 처음엔 신문기사를 읽게 한 뒤 그와 관련된 에세이를 쓰고, 교사가 첨삭지도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는 "(이런 교육 과정을 거친 결과) 이제는 주제를 받으면 머릿속에서 바로 서론.본론.결론이 나온다"고 했다.

고정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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