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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감추기엔 37년이 너무 짧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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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방금 역사책을 꺼내려다 말았다. 순간, 보나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의 역사라서가 아니다. 우리는. 일제침략사를 잊어버릴만큼 겉늙지는 앉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을 건망증에 묻어둘 한국인은 없다.
그가 분명 한국인이라면 말이다.
나는 실제로 일제를 몸으로체험한 시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짧은 체험들속에 새겨진 아픔들은 해방37년이 지난 오늘에도 변함이 없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요즘은 손발이 차가와지는 듯한 히스테리마저 느껴 스스로도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아마 일본사람들은 웃믈지도 모른다.
웃든 말든 이것은 나의, 그리고 우리 한국인의 준재심리라고 해도 좋다.
지금도 나의 기억에 또렷한 말들이 있다.
징용 공출 보국대 헌병대 순사 고등계형사 연행 조사. 어디 그뿐인가. 포고 감옥 선인총동원 제국신민…. 그무렵에 듣고 영영 다시는 들을 기회가없었던 지명들도 있다. 사이관·마라리아군도· 지나· 만주.
1965년2월17일 우리는 처음으로 일본사람의「공식사과」라는 것을 받았었다.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일본정부대표로 내한했던 「시이나」 (추명열삼낭)외상의 도착성명.
『…양국 (한일) 의 오랜 역사중에 부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며깊이 반생한다.』
그렇다치고 두나라 관계의 정상화를 우리국민이 받아들인것은 그나마 뒤꽁지에 붙은 여섯 글자, 『깊이…』 운운의 대목때문이었다.
「외무대신」이라는 직위, 정부를 대표한「전권서명자」라는직책, 역사의 응어리를 형식장으로나마 푸는 「역사적인 순간」에 문서로도 남길 말을 입바른소리라고 밀어붙이기는 싫다. 그순간만은『사과를 해야했기 때문에 사과했다』고 믿고싶다.
그후 겨우 17년이 지난 오늘,그때의 잉크색깔이 변하지도 않은 이 순간, 『참으로』『깊이』 와 같은 수식어의 여운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 단어들 자신도 어느 서류뭉치의갈피속에서 혼자 냉소를 짓고있을 것이다.
바로 요즘 두나라사이에 언성이 높아진 일본역사교과서의 낯간지러운 숙술들은 그 문서속의 「선린관계」 「주권상호전중」의 원칙이란 말인가.
한국침략이 아니고 『진출』 이며, 주권강탈이 아니고 왕(고종)의『양위재촉』이라면 그궁색한 수식어들은 왜 붙었는가.『양위재촉』 이라니, 잠시 뒤로 눈을 돌려보자. 1868년 일본의 「명치」 정부는 왕정을 복고하고 조선왕국에 그 통고서라는것을 보냈다. 벌써 이무렵부더 대륙침략의 야심을 품고 엉큼스러운 제스처를 보여준 것이다.
그 문서에「아황상」이나 「황실」 등의 말투가 들어있었다. 그때만해도 우리왕조는 위엄과기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 오만 불손한 문서를 공손히 받아들일리 없다. 보기좋게 퇴짜를 놓았다. 그때 일본군벌에서나온 반응이 걸작(?)이다.
대원군은 『부공대천지구』 라는것이다. 「원수」 라는 표현도 모자라『조선왕국을 토붕와해(토붕와해)시키고 대원군믈 칠종칠금(금) 할수있다』 고 호언했다. 그야말로 공갈이다.
어디서 말도 잘 찾았다. 「칠종칠금」 이란 제갈량이 남만의왕 맹획을 일곱번 붙잡았다일곱번 놓아준 고사에서 나온말이다. 제갈령은 끝내 남만을쳐부수고 북벌에 착수했었다.
지금 곰팡이핀 고사를 뒤적일 필요도 없지만 『불공대천의구(구)』랄때는 언제며 그의아들 고종에겐 「양위재촉」을 했다니, 그런 일제는 표변 아니면 정압착난이다.
강제연행아닌 국민징용령의 적용만해도 그렇다.우선 삭자를보자. 일제자신의 통계로도 1939년부터 패전무렵까지 1백51만9천l백42명이 일본땅으로 「관알선」 되었다. 분명한 우리말로는 붙들려 갔다. 국내에서 징용된 사람만도 4백15만명.우리민족의 5분의1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구실이 좋아 「모집」 이고 「징용」이고 「알선」 이지, 전쟁에 몰리고 있던 일제가 우리에게『전쟁터로 가시겠읍니까?』아니면『제발로 걸어둘어 오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했다는 말인가.「여자정신대」나 전선위문대에이르러선 말문이 막힌다. 일제는 징용대상자를 가려내기 위해국민등록을 강제했다. 그대상자가운데는 미혼녀 12세이상 40세이하도 포함되어 었었다. 그 「용도」 는 차마 우리입으로 밝히기 싫다.
「징용」 으로 광산에서, 탄광에서, 비행장 공사장, 댐공사장, 철도연변에서 소리도없이 죽은 사람은 6만4천여명, 징집으로 이름도 모를 이역 전장에서 죽은 우리젊은이는 15만명도 넘는다.
독립운동탄압의 대목은 곡 하나의 예만 들고 싶다. 3·l운동이 있었던 해 4월15일 수원근처 제암리매회에 구인들을 끌어모은 사람은 일본 해병들이었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무차별 난사까지. 이때 29명이 죽었다. 이들은 40여채의 민가에도 불을 놓았다. 죄가 있다면 『왜독립만세룰 불렀느냐』 는 것.
누구의 시가 있었다.
『젖먹이를 안고 숨진 젊은엄마/달아나다 쓰러진 노인네들/시커멓게 얼룩진 이 참상이/그대에겐 보이지 않는가/그대는 보지앉는가나.』
「그대」는 일본인이고 그 시를 쓴 사람도 일본인「사이뜬(재등남) 였다.
이것을 독립운동탄압이 아니고『조선인의 권리·자유제한』이란다.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번리(Weltgericht) 이라는 말이있다. 독일시인 「실러」가 남긴 무서운 명언이다.
일본은 이미 2차대전을 통해 세계의 번리를 받았다. 오늘 「경제번영」 의 후광을 업고그 세계의 간결문을 변조한다고 역사의 단죄를 면할수있을까. 우선 일제의 발길이 넘나든 현해탄의 물고기도 웃을것이다.
이제 겨우 전후37년. 역사의 유장한 흐름속에 그것은 촌각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인의 기억속에 남은 일본의 이미지를 지우기엔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오늘의 일본은 역사교과서를 통해서나마 후세들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와 인간다운 삶의 길을 가르쳐 주어야할 것이다. 이것만이 역사심간의 용서를 받는 길이다. 또 일본이전중받는 길이기도 하다.
「맥아더」장군이 일본인을 두고『정신연령이 11살밖에 안된다』고한 얘기에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비극인가.<최종률><본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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