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과 서구의 관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미·서구 관계가 이렇게 악화된 적이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총 경비 백억 달러의 가스 파이프라인 공사로 경제적인 불황에서 벗어나겠다던 서구국가들의 부푼 기대가 미국의 대소경제제재의 강화로 무산될 위기를 맞아 피해자인 서구 쪽이 미국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발을 하고있다.
더구나 걸린 문제가 장기적인 외교노선이나 전략과 같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당장 손에 잡히는 달러이기 때문에 나토 동맹체제가 멍이 들더라도 피차간에 아직은 양보를 할 자세들이 아니라, 사태는 한층 심각하다.
사실 공사의 규모와 그 경제적인 진폭을 보면 어느 한족에 양보를 기대하기 어렵고, 서구의 반발하는 입장에 동정과 이해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서부 시베리아에서 소련·체코국경까지 연결되는 파이프라인은 길이가 장장 5천km나 된다.
84년까지 공사가 끝나면 소련은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같은 나라에 연간 1조 4천만 큐비크피트의 천연가스를 공급하게 된다.
소련은 현재 지구상의 천연가스 매장량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는데 계획대로 되기만 하면 서구의 대소 천연가스 의존도는 지금의 9%에서 25%로 크게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84년부터 25년간 해마다 80억 달러의 외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 특히 대소 강경자세를 고집하는 공화당 보수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첫 째는 서구가 소련의「에너지 식민지」가 되는 사태, 둘째는 소련이 연간 80억 달러씩 받는 돈으로 군사력을 대폭 증강할 여유가 생기는 사태를 힘 자라는 데까지 막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각국은 이 공사를 놓치면 몇 개 회사는 도산하게 될지도 모르고 실업구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소련에 계약불이행의 벌과금까지 물어야한다.
서구 국가들이 미국의 이기주의와 오만을 비난하고, 국제사법재판소에의 제소를 고려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그들은 미국자신은 소련에 곡물 수출을 계속하면서 우방들의 대소 거래에만 제동을 건다고 지적하고있다.
가스 파이프라인 분규의 해결이 한층 어려운 것은 그것이 미·서구간의 전반적인 경제분규와 뒤얽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금리와 달러 강세에 대한 서구의 불만과 철강, 농산물, 섬유제품을 둘러싼 대립이 이미 미·서구관계를 악화시켜 놓고 있는데 가스 파이프라인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만약 지금의 분규가 대서양을 사이에 둔 경제전으로 확대된다면 불행은 경제적인데 그치지 않고 대소전열의 약화, 서방진영 결속의 약화로 연결되는 것이 필연적이다
미국이 파이프라인 공사에 미국기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서구와 소련이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여 공사를 시작하는 길밖에 없다. 그렇게되면 공사는 2∼3년 늦어지게 된다.
바로 이점이 하나의 타협점이 될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파이프라인 공사와 그에 따른 소련의 경제적인 이득을 완전히 봉쇄할 수 없고 다만 몇 년 뒤로 미룰 수 있을 뿐이라면 그걸 위해서 나토체제의 위기라는 대가를 지불할 만한 것인가를 미국은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할 것이다.
소련으로 보자면 가스 파이프라인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그것대로 좋고, 미국과 서구가 서방진영 안에서 집안싸움을 벌이면 그것 또한 환영할 만한 일이다.
미국과 서구는 보다 거시적,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소련의 장단에 춤추는 격인 파이프라인 분규의 해결을 서둘러야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