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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감시사회와 민주주의의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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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디스토피아의 극점을 묘사했다. 오세아니아라는 가상의 전체주의 체제는 국민을 세뇌시키기 위해 과거사를 끊임없이 날조한다. 당이 새 언어를 만들어 인민의 모든 생각과 감정까지 제어한다.

비록 1948년에 발표된 책이지만 오늘날에도 긴박한 현장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만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장치다. 수.송신 기능을 함께 갖춘 텔레스크린이 도처에 설치되어 사상경찰이 국민의 모든 소리와 움직임을 포착해 빅 브러더의 이름으로 통제하고 규율하며 처벌한다. 그 결과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완벽하게 소멸하며 비판과 저항은 뿌리 뽑힌다. '1984년'은 당대 소련 공산주의를 겨냥한 작품이었으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정보화의 진전과 함께 재조명받고 있다.

예컨대 미 국가안보국(NSA)이 운영하는 지구적 정보감청.감시망인 '에셜론'(Echelon)은 전 세계의 전화.e-메일.팩스.단파 등의 모든 유.무선 통신을 도청한다. 에셜론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캐나다.호주 등의 정보기관과도 연계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합된 정보는 인공위성을 통해 메릴랜드 소재 NSA로 보내지고, NSA의 수퍼컴퓨터는 음성인식 장치와 단어검색 시스템 등을 이용해 필요한 정보를 추출한다. NSA는 직원 수나 예산에서 CIA나 FBI와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거대한 최상위 비밀정보기관으로 공인된다.

1968년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도 NSA의 지휘 아래 북한과 소련 해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처럼 공산권과의 정보전을 위해 만들어진 에셜론은 냉전 종식 후 테러나 국제범죄 방지 명분으로 지속되었으나 미국의 산업 정보를 위해 악용되기도 하며 세계적 차원에서 민간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있다고 영국의 BBC방송이 보도한 바 있다. 지구 전체의 민주주의 혁명을 주창하는 미국의 야누스적 두 얼굴이 입증되는 대목이다.

뜨거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는'X파일'사건도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 X파일을 배태한 97년 안기부의 전 방위적 불법 도청은 YS정부 아래서 자행되었다. 김영삼씨는 자신이 불법 도청과 공작정치의 최대 피해자라고 강변하던 정치인이었으며 93년에는 통신비밀보호법까지 제정했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대통령 재직 동안 도청을 주요 통치수단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 내로라하는 한국 사회의 실세들이 다 불법 도청의 표적이 되었다 하니 정적이나 반대세력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X파일 사건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97년 대선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했던 정치.경제.검찰.언론권력 사이에서 이루어진 유착과 담합의 편린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꿈에 취해 있을 때, 그 배후에서 진행된 권력게임과 부도덕한 흥정의 모습은 민주공화국의 기치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당국의 엄정한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져야 마땅한 소이다.

둘째 측면은 국가기관에 의한 무차별적 불법 도청이 갖는 반민주적.반인륜적 함의다. 이 문제는 첫째 사안이 야기한 국민적 분노에 가려 그 중요성이 제대로 조명되고 있지 못하다. 전 국민에 대한 감시를 정권안보의 초석으로 삼아 온 군사독재는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X파일은 민주화의 승리를 자축했던 YS문민정부의 허구성을 통렬히 증언한다.

X파일을 만든 안기부의 특별조직 미림팀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98년에 '해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99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였던 이부영 의원의 폭로로 그 존재가 처음 공개된 국정원의 감청전문부서인 과학보안국, 즉 이른바 제8국은 2002년 10월에야 국정원 조직이 개편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고 당시 천용택 국가정보원장이 증언한 바 있다. 당시 8국은 국정원 내에서도 최고의 비밀부서로서 최대의 인원과 예산을 사용했다고 한다.

국가정보기관의 도청이 자연스러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전 방위 감시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X파일은 국가운영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가 당대의 권력자들에 의해 추악한 권력게임의 소재로 악용된 예다. 그 앞에서 '모든 국민이 사생활의 자유와 통신비밀을 침해받지 않는다'는 헌법 제17조와 18조는 휴지가 되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기반한 한국 민주주의도 허깨비가 되었다. X파일의 내용에 대한 대응과 함께 이 본질적 위기상황도 정면에서 다뤄져야 마땅하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사회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