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과 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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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 각주의 공식행사 의전을 보면 입장순서가 판사·주 상원의원·하원의원·시장·재향군인 순으로 되어있다.
판사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와 권위를 상징하는 좋은 예다.
판사는 사법부를 대표한다. 한 나라의 양심을 대표하는 곳이 사법부고 보면 판사에 대한 존경과 예우는 당연한 일이다.
우리의 현실은 좀 다른 것 같다. 흔히들 『판사는 아들 같고 검사는 형님 같고 변호사는 아버지 같다』는 비유를 한다. 단독사건의 경우 새파란 젊은 판사가 주로 맡아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81년 현재 우리 나라 초임법관의 평균연령은 29.5세였다. 영국의 52.0세, 미국의 47.3세에 비해 엄청난 차이다. 또 우리 나라 변호사의 평균연령 58.3세와 비교하면 더욱 큰 연령차가 난다.
현행 법관 임용제도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30세 안팎의 젊은 판사들이 형사사건의 유·무죄에서부터 남의 안방 가정파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인간사의 시시비비를 가리고있는데 무리가 있다는 의견들이다.
법관은 재판을 하는 사람이고 변호사는 재판을 받는 사람이다. 때문에 법관은 변호사보다 훨씬 많은 경험과 식견, 원숙하고 고상한 인격을 필요로 한다.
사회와 인생경험에서 얻어진 「주름살」이 책 속의 법률지식보다 더 훌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판·검사는 풍부한 경험과 인격을 갖춘 변호사 중에서 선임해야 한다는 이론이 성립한다. 소위 「법조일원화 문제」다.
민한당의 「법관 임용 개선안」은 이런 관점에서 재조·재야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정책제안의 바닥에는 지금까지 우리네 사법부의 권위나 국민으로부터의 신뢰가 그만큼 떨어져있다는 의미를 깔고있다.
한 정당의 의견인데다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법원·검찰·재야 모두가 『언젠가는 그렇게 되어야 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금년 상반기에만도 법관결원이 1백50여명, 검사부족수가 1백60명 선이다. 오랜 경륜을 지닌 훌륭한 변호사를 오랫동안이나 기다려 판·검사로 맞아들이기엔 매일매일 밀어닥치는 사법업무의 양이 너무나 방대하다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판·검사에 대한 변호사만큼의 경제적 예우 또한 문제다.
그러나 이들 문제보다 본질적인 것은 오염되기 쉬운 풍토다. 변호사로서 경륜을 쌓는다고 존경과 신뢰를 받는 판·검사가 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경력을 쌓다보면 불가피하게 「오염」이 따를 수 있고 우리의 재야풍토는 곳곳에 오염지역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법관임용제도개선」은 이 오염의 위험성이 배제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논의될 성질인 것 같다. <고정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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