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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②의식주] 14. 방방곡곡 같은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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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손맛이란 결국 음식을 만드는 정성의 덩어리다. 메주를 손질하는 투박한 손에서 그 맛이 나왔다. <중앙포토>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살고 있는 박승효(53·회사원)씨는 요즘 영남지역에 갈 때마다 입맛에 관한 한 딴 동네에 온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식당은 물론 친지 집에서 음식을 먹어 보면 ‘전라도’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두어 달 전 경남 밀양의 상가(喪家)에서 먹은 육개장이 내가 먹어 본 것 중 맛이 최고였다”고 했다.

경상도 음식은 짜고 매웠는데…

40년 전만 해도 지방에 따라 음식 맛에 차이가 컸다. 남부지방인 전라도·경상도의 음식은 서울·경기와 충청도 등 중부지방에 비해 대체로 맵고 짰다. 또 경상도와 전라도가 달라 김치만 하더라도 경상도에서 더 짜게 담그고,고춧가루를 많이 썼다.반면 전라도에서는 찹쌀 풀 등 곡기와 젓갈을 써 조화로운 맛을 내고 국물을 적게 잡았다. 그러나 이젠 지방에 따른 음식 맛의 차이와 특징이 심지어 섬까지 거의 없어졌다. 제주도에서는 과거 갈치조림을 간장만으로 맛을 냈다. 고추 농사를 짓지 않아 고춧가루가 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춧가루나 고추장 범벅의 갈치조림이 흔하다. 자리물회도 된장만으로 맛을 낸 담백한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고추장 양념으로 맛을 내고 있다.

한라대의 오영주(47)제주향토식품연구소장은 “밭농사가 보리·콩·조 위주이고 양념류는 재배하지 않아 음식 양념을 간장·된장 등으로 단순하게 했었으나 갖은 양념을 쓰는 육지 음식을 따라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제주의 식당 주인들이 대부분 호남 등 뭍 출신인 데다,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추다 보니 토속 음식조차 육지식으로 변질됐다는 설명이다.

어딜가나 ‘원조’맛볼 수 있어

멸치회와 세발낙지는 각각 부산이나 목포에 가지 않으면 제대로 맛보기 힘들다. 멸치와 세발낙지 자체가 시간이 지나면 선도가 급격히 떨어져 멀리 수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특정 지역에만 있는 음식은 많지 않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모든 종류의 음식을 원조 지역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맛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래 파전과 마산의 아구찜,경북 안동의 닭찜, 강원도의 닭갈비·막국수 등이 그러하다. 위생적인 염장·포장으로 품격이 높아진 안동 간고등어의 경우 1999년부터 미국·캐나다·칠레·일본 등 10여 개 국가에 수출까지 할 정도다. 심지어 평양 냉온면·만두와 아바이순대 등 북한 음식들마저 휴전선을 넘어 와 지방 중소도시들에까지 퍼졌다. 탈북자들이 전문 음식점을 내고 체인까지 생긴 결과다.

전주 출신의 시인이자 영화배우인 백학기(49·서울)씨는 “요즘은 서울·대전·대구 등 어디를 가든 전주 것 못지 않은 콩나물국밥으로 속을 확 풀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신안 홍어가 이튿날 서울 식탁에

먹거리가 부족하던 시절에는 지역에서 많이 나는 동·식물 재료를 이리저리 요리해 주린 배를 채우고 입맛을 돋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강원도에서 옥수수나 감자로 만든 요리가 매우 많았던 것처럼. 전라도 음식이 맛있을 뿐 아니라 종류가 다양했던 것도 들녘이 넓은 데다 산이 많고 바다도 끼여 농·수·축·임산물이 풍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 경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84년 영·호남을 잇는 88고속도로가 개통하는 등 고속도로망이 속속 뚫렸다. 또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는가 하면 열차 등의 소요 시간이 갈수록 짧아졌다. 새벽에 부산 어시장에 나온 어패류가 점심 때면 서울이나 청주에 있는 식당이나 집의 식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신안군 흑산수협 이길흥(35)씨는 “먼바다에 있는 신안군 홍도에서 잡힌 홍어도 일반 택배를 이용하더라도 다음날이면 서울 음식점이나 애호가의 식탁에 오른다”고 말했다.

교통의 발달은 또 사람들의 왕래를 늘려, 지역 고유 음식들과 맛을 내는 비법을 각 지역이 서로 나눠 갖게 됐다. 80년대 이후 경제성장 및 소득수준 향상으로 맛있는 것을 10리 길,100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풍조가 생겼다. 게다가 TV를 비롯한 매스컴이 발달하면서 ‘맛있는 음식과 조리법’이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됐다. 농어업 기술 발전 또한 음식의 전국화 및 맛의 평준화를 촉진했다.

신우철 전남 완도군 해양수산사무소장은 “90년 초반부터 광어·우럭 등 어류 양식이 대규모로 이뤄진 결과 살아 있는 생선의 회 등을 바닷가가 아닌 내륙지방에서도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 옛날 어머니 손맛이 그리워

지방마다 음식의 맛과 종류가 비슷해지면서 대신 각 고장의 토착적인 맛이 사라지고 지역 특유 음식들의 다양성이 없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농업전문대 이건순(57·여·식품영양학)교수는 “각 지방의 향토음식들이 아예 흔적조차 없어지거나 다른 음식의 특징을 가미하면서 본래 맛이 변질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또 외국 요리의 특징까지 뒤섞인 ‘잡탕’ 음식들이 양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심재열(51·부산시 해운대구·무역업)씨는 “시골 집에서조차 건강을 생각해 짜고 매운 맛을 줄여 가는 까닭에 고향에 가도 어릴 적의 어머니 손맛을 느끼기가 갈수록 어려워져 참 안타깝다”고 했다. 소설가인 문순태(64·광주)씨는 “최고로 쳐 주는 전라도 음식들조차 특유의 ‘개미’(진하면서도 깊은 맛)가 점차 없어지고 있다”며 “옛날에 많이 해 먹었던 집장(된장의 일종) 등은 일반 가정에선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됐다”고 말했다.

이해석 기자

사라져간 음식들
그 많던 보리개떡은 어디로 갔을까

째지게 가난했던 시절 주린 배를 채워 주고 군입정거리가 돼 주었지만 이젠 주변에서 사라진 추억의 먹거리들이 적지 않다. 밥의 양을 불리기 위해 시래기를 넣어 짓는 시래기밥은 물론 시래기국도 일 삼아 식당들을 찾아 다니거나 특별히 만들지 않으면 맛을 보기 어렵다.

무를 썰어 넣고 함께 지은 무밥과 고구마밥,강원도 산간지방에서 옥수수를 갈아 끓여 먹던 강냉이죽,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먹던 참나물죽, 쌀과 라면을 섞어 끓인 라면죽, 보리 죽 등도 그러하다. 수박껍질 무침과 쇠비름나물, 경상도 지방서 삶아 무쳐 밥을 비벼 먹곤 하던 ‘말(몰)’, 학교에서 점심 대신 급식하던 옥수수빵·보리개떡도 나이 든 사람들에겐 삼삼하다.

군것질이란 것도 민대(덜 여문 보리나 밀을 짚불에 구워 먹던 것)와 씹어 단물을 빨아 먹던 단수수깡, 물에서 나는 밤이라고도 했던 마름 과 튀밥·뻥튀기·볶은콩 등으로 입을 달래는 게 고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볶은 보리를 우리고 당원이나 사카린으로 단맛을 낸 뒤 얼음덩이를 넣어 한 컵씩 따라 팔던 냉차, 먼 길을 온 손님에게 정성스레 내놓던 한 그릇의 설탕물, 아침 다방서 식사 대신 모닝 커피와 함께 먹던 에그 프라이, 달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 등도 이젠 추억속에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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