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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청(38)정치공작대사건(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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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남로당의 테러와 파괴활동은 혼란의 근원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혼란은 모든 질서를 헝클어 놓았다. 따라서 남로당 지하조직 색출은 최대의 과제였다. 그러나 이 틈바구니에서 경쟁자를 공산당으로 몰아붙이는 불행한 풍조가 돋아났다.
남로당 지하조직은 여-순 반란사건을 고비로 완전히 무너져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돼있었다. 그만큼 수사당국의 활동을 국민도 협조했다.
그러나 군번을 포함한 각계의 광범한 푸락치 소탕, 그리고 「반민법 파동」 「국회 푸락치 사건」을 겪는 동안 어느새 남로당 푸락치가 정치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당 수색이라는 이름아래 권력이 남용되고 독재의 씨앗이 싹터 갔다고나 할까. 50년 봄 정가를 농락한 이른바 「정치공작대사건」은 이런 풍조를 반영한 웃을 수 없는 희극이었다.
50년 4월5일 완전 무장한 50여명의 헌병과 경찰이 서울 금호동 산기슭의 한 독립가옥을 포위했다.
그 얼마 뒤 집안에서 3발의 총소리가 울린 뒤 경찰대가 한 사람을 체포했다. 최동석이라는 이 남자는 인민군 특수부 사령관이라고 자백했다. 이어 헌병과 경찰대는 경무대에서 2㎞ 남짓 떨어진 북악산 기슭의 한 동굴 땅 속에 묻힌 권총과 장총 각 1자루, 그리고 실탄과 뇌관 등을 발견했다.
김병완 치안국장서리, 최영희 헌병사령관이 한 민간인의 정보제공을 받으며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킨 작전이었다. 삼엄한 출동에 비해 너무도 초라한 전과밖에 올리지 못한 이 작전의 지휘자는 정운수. 그는 8·15 후 이박사의 비서라면서 이화장을 드나들었고 정부수립 후 잠시 해휘공사 사장을 지냈었다. 그가 지휘한 이 작전은 사실은 작전의 시작이었다.
체포한 최동석에게서 한민당 수뇌진과 연결돼 정부전복음모를 꾸민 문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치음모가 밝혀져 그들의 작전이 분쇄된 것은 검찰이 입회란 명목으로 작전을 참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초 이들의 작전계획엔 검찰을 제외하기로 했었다.
바로 작전 개시 직전 백성욱 내무장관은 권승렬 법무장관을 불렀다. 백장관은 『오늘밤 남로당 푸락치의 반란음모를 소탕한다. 헌병과 합동작전을 하는데 검찰은 일체 간여하지 말라. 이건 대통령의 지시다』라고 통보했다.
권장관은 백내무의 이런 통보를 검찰간부와 협의했다. 결론은 간여는 않더라도 최소한 입회는 해야겠다는 것. 결국 권장관이 경무대에 들어가 입회만 하겠다는 선에서 대통령의 승인을 얻었다.
선우종원 오제도 정희택 세 검사가 작전본부라는 조선호텔에 갔을 때 정운수는 군번의 수뇌진을 거느린 위세 당당한 모습으로 『왜 왔느냐』고 호통이었지만 대통령의 입회승인이라는 말엔 그도 어쩌지 못했다.
처음부터 의혹의 눈으로 작전을 지켜본 검찰은 무엇인지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심증을 굳혔다. 이래서 문제의 범인 최동석이 수감된 용산서 감방에 13명의 수사요원을 침투시켰다.
그 당시 용산서엔 13개의 감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과 접촉한 수사요원이 정치음모의 꼬리를 잡았다. 『내가 잠시 감방생활을 하지만 대통령의 표창을 받게될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데까지 최를 유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른바 푸락치 소탕작전은 그 작전의 주역들에 대한 수사로 반전했다.
그랬지만 수사는 벽에 부닥치고 숱한 의문은 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한민당 수뇌진 제거가 목표였다면서도 정작 한민당이 국회조사를 막아선 기괴한 사건처리 등이 수수께끼의 하나다.
정치공작대의 발상은 권민당 선전부장 김태수(일명 김영)의 특수수사기관 조직구상에서 싹텄다.
김태수→정동엽→김낙영→오관수→이무열→연결되어 간 이들 일당은 대통령 직속 정보기관을 설치하는 공작에 나섰다.
정동엽은 군내에 4백명, 서울시청 등에 30여명의 남로당 푸락치가 있다는 정보를 앞세워 백내무장관과 친분이 두터운 오관수를 접촉했다. 오관수는 그들의 제안에 동조하면서 신성모 국방장관의 장남 신명규 소령이 좌익색채가 짙으니 내사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들은 신소령의 국대안 반대운동 등 좌경활동경력을 들춰냈다. 여기서 다시 대통령 정치고문이라고 자칭하는 이무열과 연결됐다. 그리고 이무열의 요청에 의해 정보는 더욱 운색됐다.
안일이란 인민군 특수부 사령관이 남파돼 신소령과 밀회하여 정계, 군번의 광범한 남로당 푸락치로 정부전복을 공작한다는 것.
이번 정보가 만들어지자 이무열이 조선호텔 215호실의 정운수를 등장시켰다. 정은 경무대를 다녀왔고 곧바로 백성욱 내무와도 연결됐다.
3월20일 밤 정의 숙소엔 백내무의 연락을 받은 신태영 참모총장, 최헌병사령관, 김치안국장서리 등이 이른바 정치공작대 간부와 회동했다. 군에선 정보국장도 나왔으나 정이 기피해 곧장 돌아가야 했다. 이 모임의 결과로 정치공작대엔 경찰병원 안에 사무실이 마련되고 무기 등이 제공됐으며 「상기자는 승인 없이 심문·구금을 불허한다」는 치안국장·헌병사령관 공동명의의 신분증이 교부됐다.
이로부터 이원장 중령의 숙부를 포함해 그들이 지목한 남로당 혐의자가 속속 체포되고 이른바 경찰병원에서의 고문이 시작됐다. 그러나 기대했던 각본에 진전이 없자 그들 내부에서 남로당 푸락치를 만들고 무기도 은닉하는 조작극을 했고 그 절정이 4월5일 밤의 이른바 소탕작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노린 것. 최초의 그들 구상인 중요정보활동의 공로로 대통령의 직속 정보기관을 창설하는 것인데 이 계획은 쉽게 자백 받았다. 그런데 문제의 제2막 정계요인을 공산당 푸락치로 몰아 제거하는 쪽으로 발전해간 광정을 조사하는 일은 엄청난 장애에 부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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