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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책읽기] 문화가 인간만의 것이더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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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70여년 전 포도주를 앞에 둔 채 침팬지에게 테이블 매너를 전수하고 있는 동물원 사육사.

저명한 동물학자 제인 구달이 40여년 전 출판사에 원고를 넘겼을 때였다. 침팬지를 사람처럼 '그','그녀'로 표현한 데 대해 편집자가 대뜸 이의를 달았다. 침팬지를 가리키는 대명사를 모조리 '그것'으로 고쳐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구달은 침팬지에서 인간과 같은 품성을 찾아냈지만 세간의 상식은 여전히 인간과 동물을 확연히 구별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 동물과 구별되는가? 과연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가? 그 대답으로 흔히 제기되는 단골어휘들이 사회생활.도구.언어.문화지만, 최근 동물학자들이 그걸 뒤흔들고 있다. 구달은 침팬지들이 도구를 이용해 나무 열매를 깨먹고, 약초를 먹어 기생충을 없애거나, 죽은 동료 앞에서 애도하는 모습을 관찰했다. 그의 제자 샬럿 울렌브럭은 동물들의 의사소통 방법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

그에게 언어란 개체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도구이며, 따라서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쯤 되면 문화 정도가 동물성으로부터 인간을 격리해주는 마지막 보루가 될 법 하다. 정말 그럴까.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는 문화가 인간의 전매특허라는 '믿음'을 해체시킨다. 영장류 연구의 1인자인 네델란드의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발이 해체작업의 그 맹장이다.

몇 개월 전에 새 번역으로 나온 '침팬지 폴리틱스'(바다출판사)의 저자인 그는 이 책에서 동물도 문화를 갖고 있다는 근거들을 제시한다. 흙 묻은 고구마를 물에 씻어 먹는 일본 고시마 지역의 원숭이, 출산하려는 암컷 앞에서 새끼를 낳기 위해 더 좋아보이는 자세를 취해 보이며 출산을 유도하는 로드리게스 과일 박쥐, 약한 놈끼리 동맹을 맺고 강한 놈을 내쫓아버리는 침팬지, 새끼를 데리고 다니며 복잡한 사냥기술을 가르쳐주는 범고래….

이 책에서 문화란 음악이나 미술처럼 세련된 취미나 고상한 지성의 산물에 국한되진 않는다. 동물학자들이 말하는 문화는 조금 더 단순하다. 이들에게 문화란 '다른 개체나 선조에게서 습득하는 지식과 습관'을 뜻한다. 초밥 요리사의 솜씨를 보며 초밥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견습생처럼 동물도 '해보이기'와 '따라하기'의 방식으로 나름의 문화를 전수한다. 이에 따라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집단이 다르면 행동도 달라진다. 바로 이것이 동물의 세계에도 문화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프란스 드 발은 더 나아가 도덕의 영역도 건드린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자연에서 동물들은 서로 협력하고, 때론 이타적 행동도 한다. 물론 이를 두고 '동물의 도덕'으로 비약할 필요는 없다. 그는 동물들이 진화 과정에서 협동심과 이타심의 충동을 갖게 됐다고 쿨하게 설명한다. 이같은 관찰에서 나온 결론은 '인간=문화, 동물=자연'이라는 이분법적 등식을 버려야 한다는 대담한 학설로 이어진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가로놓인 인위적인 바리케이트를 허물자는 주장이다. 때문에 논쟁적인 이 책에서 프란스 드 발은 인간과 동물,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에 섰던 학자들을 도마 위에 올려 '작살'낸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심리학자 프로이트…. 이들의 철옹성 학설도 자연과학이 들이대는 증거 앞에 의외로 취약해 보인다. 그 점에서 프란스 드 발의 이 책은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에 대한 중대한 문제제기다.

확실히 요즘 세상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유럽중심주의.남성중심주의 등 온갖 '중심'이 허물어지는 세상이다. 허물어지는 또 다른 중심이 '섹스의 진화'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말대로, 종(種)차별주의(speciesism) 혹은 인간중심주의이다. 프란스 드 발은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에 '과학적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셈이고…. 허무하시다고? 그건 저자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프란스 드 발은 무슨 동물숭배나 인간혐오증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과 문화의 본질을 보다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다. 철학의 영역에서 다뤄지던 주제를 자연과학의 시각에서 접근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철학동네에서 자연과학의 도전에 답을 할 차례다.

한편 프란스 드 발은 1982년 '침팬지 폴리틱스'라는 명저를 펴낸 뒤 이후 지금까지 미국 에모리대에 재직중이다. 요즘 과학서의 대부분 저자들처럼 전문적인 내용을 쉽게 전달하는 글솜씨가 뛰어나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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