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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와의 대화는 박 대통령 각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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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0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환담을 나눈 것은 ‘준비된 이벤트’였다. 외교부 관계자는 11일 “만찬 자리가 알파벳 순서로 배치되는 건 사전에 이미 공지된 사안”이라며 “오랜 시간 옆자리에 앉게 되는 만큼 관련 현안 등을 사전 정리해 보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아베와 대화를 할지, 어느 정도 깊은 대화를 나눌지, 주제로 무엇을 선택할지를 윤병세 외교부 장관 및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상의한 뒤 결정했다는 뜻이다.

 지난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안녕하십니까”라며 한국어로 인사한 아베 총리를 외면했고, 다른 다자회의에서도 아베 총리와 의례적인 인사말 외에는 말을 섞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주빈국인 중국이 일본과 관계 개선을 위한 4개의 합의사항을 발표하고, 10일 오전 중·일 정상회담을 개최하면서 박 대통령도 아베 총리와 대화를 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했다.

 중·일 정상회담 개최 직후 한·일 정상이 접촉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외교적 고립’으로 비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 듯하다. 문흥호 한양대 중국문제연구소장은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아베 총리와 만난 만큼 박 대통령도 일본을 대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넓어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근 아베 총리가 다자정상회의를 계기로 ‘박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우리 측에 반복해 전해 왔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한다. 그간 일본은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려 하지만 한국 측이 완고하다”는 입장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알려 왔다. 하지만 이번 ‘이벤트’로 박 대통령은 한·미·일 공조를 우려하는 미국에 “우리도 한·일 관계를 풀 의지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 셈이 다.

 하지만 ‘대화’는 하되 기존의 ‘원칙’은 유지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회담 후 브리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일본의 진정성 있는 행동 변화를 촉구했다.

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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