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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울리는 인터넷 약관] "반품 안 됩니다 … 약관 안 보셨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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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이버 공간에 들어갈 때 처음 마주치는 게 사이트 운영업체가 마련한 약관이다. 온라인에서 정보를 검색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물건을 사려면 해당 사이트에 약관 동의절차를 거쳐 회원으로 가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인터넷 약관들이 한마디로 '부실 덩어리'라고 지적한다. 법률용어로 가득해 읽기도 어렵지만 내용도 이용자 권익보다 해당 사이트의 권리를 강조해 놓은 게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지가 최근 한국컴퓨터생활연구소와 공동으로 국내 주요 검색포털과 사이버쇼핑몰, 온라인게임 등 20여 개 사이트의 약관을 분석하고 이용 실태를 점검한 결과 인터넷 약관들이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보상 책임 떠넘기기=주부 김경애(41)씨는 지난달 P 인터넷 쇼핑몰에서 카메라 가방을 샀다. 그런데 가방이 작아 P사에 반품을 요구했더니 회사 측은 약관에 '인터넷 쇼핑몰에 올려진 해당 제품에 반품 불가를 미리 공지했으면 청약을 철회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하며 거절했다. 김씨는 결국 P사와 한 달을 실랑이하다가 소보원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환불을 받을 수 있었다. 한국소비자보호원 이기헌 사이버연구팀장은 "'전자상거래소비자보호법'에 따르면 인터넷 쇼핑몰들이 약관에 '환불 불가'조항을 명시한다 해도 이는 명백히 소비자에게 불리한 내용이므로 무효"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이 이를 몰라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0대 해커가 인터넷뱅킹에 몰래 들어가 다른 사람의 금융계좌에서 5000만원을 불법 인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해당 은행의 무책임한 대응에 울분을 삼켜야 했다. 이 은행의 전자금융거래 약관에는 '이용자 정보를 본인 이외의 제3자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며, 도용이나 위조 또는 변조를 방지하기 위한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등 이용자 책임만 규정돼 있던 것. 이 약관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은행에 신고해도 보상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실정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신용카드의 경우 도난 사실을 신고한 이후 발생하는 모든 책임을 신용카드사가 진다"며 "그러나 인터넷뱅킹은 피해 신고 시기와는 무관하게 금융기관이 전산 작업을 끝낸 이후부터 발생한 사고만 책임지게 돼 있다"고 말했다.

◆ 개인정보 유출=고객이 약관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주민등록번호 등 회원정보를 유출하는 사이트도 있다. 이달 초 직장인 이교형(37)씨는 A보험사 영업직원에게 상품 구매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았다. 이씨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이나 전화번호 등의 정보를 알았느냐고 묻자 영업직원은 K사이트에서 받았다고 했다. K사이트는 그가 최근 정보를 검색하려고 회원으로 가입했던 서비스. 나중에 약관을 보니 '회원 정보를 제휴업체에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참여연대는 최근 포털사이트 등에 보유 중인 회원들의 주민등록번호의 경우 법적 근거가 없으니 즉각 삭제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참여연대 측은 "개인정보 유출 피해를 막으려면 실명확인 즉시 해당정보를 파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이 사이버공간에 올린 창작물조차 소유권을 해당 사이트에 뺏기는 등 지적재산권 보호도 무방비다. 대학생 박은경(20)씨는 C사이트에서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을 해당 업체가 약간 고친 뒤 다른 서비스에 활용한 것을 최근 확인했다.

그는 회사 측에 지적재산권 보호를 요청했다. 하지만 "회원 동의없이 창작물을 수정과 개조, 출판할 수 있도록 약관에 돼 있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 사기성 요금 부과=요즘 일부 사이트는 무료 서비스로 회원 가입을 유혹한 뒤 약관에 슬그머니 '유료 서비스 자동 계약'등의 조항을 넣어 요금을 내게 한다. 회사원 진기욱(29)씨는 올해 초 자신의 PC가 컴퓨터바이러스에 감염되자 D사에 1개월 회원으로 가입한 뒤 치료를 했다. 그런데 최근 휴대전화 결제금액을 살펴보자 D사로 월 2000원씩 빠져나간 사실을 발견했다. 해당업체에 연락해 이를 항의하자 약관상 '이용자가 결제 해지를 하지 않으면 계약은 자동 연장된다'는 내용을 전해들었다.

소보원 측은 "올 들어 지난달까지 이 같은 피해상담이 100건을 넘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배나 늘었다"며 "특히 컴퓨터바이러스 치료 사이트에 대한 상담이 많아 '자동 연장'조항의 부당성 여부를 검토해 조치를 강구키로 했다"고 말했다.

인터넷 업체인 N사도 계약기간을 자동 연장한다는 약관을 악용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불공정 행위로 지적받았다. N사 약관에는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 해지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연장되고, 연장 이후 서비스를 중단하면 중도 해지 위약금을 물어야 하는 내용이 있었다. 공정위 조성국 약관제도과장은 "N사의 약관은 이용자가 계약을 자유롭게 해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것으로 고객에게 불리하다"며 "이 조항을 아예 삭제하는 등 약관 내용을 고치도록 했다"고 말했다.

◆ 내용도 어렵고 부실=컴퓨터생활연구소의 분석 결과 사이트마다 서비스나 이용자는 다른데도 약관 내용은 거의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기준 연구소장은 "다른 사이트의 약관을 복사한 뒤 일부 내용만 해당 사이트에 맞게 바꿔 놓은 수준이 대부분"이라며 "특히 약관이 길어 끝까지 읽어보려면 인내심이 필요한 데다 그 내용도 법률적 용어가 많아 전문가가 아니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돼 있다"고 말했다.

여기다 네티즌이 약관을 읽어봐도 그 내용이 부실해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통신위원회 김인수 사무국장은 "이용자의 권리와 해당 사이트의 책임범위 등을 명확하고 상세히 기재한 인터넷 약관은 드물다"며 "약관은 업체 자율로 정하는 만큼 정부가 손을 대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네티즌들은 이를 잘 모르고 있다. 소비자보호원이 최근 초고속 인터넷의 약관(4개사)과 이용자(540명)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약관에 '문제가 발생해도 소비자 청구가 있을 경우에만 손해를 배상한다'는 내용이 있으나 이용자들은 이를 거의 모른다고 답변했다.

이원호.이희성.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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