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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밥 한번 먹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언제 밥 한번 먹읍시다.’

 나이 사십에 사진동아리 모임에 다닌 적이 있다. 어느 날이던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지도교수가 던진 말이다.

 ‘저 사람이 왜 나랑 밥을 먹자는 건가. 의미가 뭘까. 언제? 설렁탕 아님 한정식? 내게 무슨 사적인 감정이라도?’ 일주일 내내 고민고민 혼자 만리장성을 쌓다가 ‘제가 요즘 바빠서 식사를 같이 못하겠네요’라고 거절하리라 맘먹고는 모임에 갔다. 하지만 그 후 여섯 달이 지나고 그 모임이 끝날 때까지 밥 먹자는 말을 다시는 듣지 못했다. 그때 알았다. 그 말은 ‘See you later’ 같은 ‘나중에 봅시다’의 흔한 인사말이었다는 것을. 흔히들 쉽게 말한다. ‘밥 한번 먹자’고. 이거 곧이곧대로 들으면 우스갯소리로 원숭이 되는 거다.

 언젠가 이효리가 TV에 나와 밥 한번 먹자고 하더라. 밥솥 광고였다. 하지만 그녀의 ‘밥 한번’은 보통사람들같이 그저 해본 공염불은 아니었다. 그녀는 비록 밥을 사지는 않았지만 유기견의 대모 역할도 하고, 노인들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하며, 지금도 밥 한번 제대로 쏘면서 제주도에서 잘살고 있다.

 요즘 치사하게 아이들 먹일 밥 가지고 ‘공짜다 아니다’ 말들이 많다. 무상급식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시민들의 지지를 받은 후 대부분의 지자체에서 도입해 지난해에는 445만 명가량이 혜택을 받고 있었는데 지난 3일 홍준표 경남지사가 무상급식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무상급식의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세수도 부족하고 재정도 열악하고.’ 이해는 한다. 하지만 무상급식이든 무상보육이든 무슨 공약이든, 어쨌든 ‘밥 한번 먹자’ 같은 공염불은 아니었다는 것을 일단 국민에게 솔직히 사과하고 양해를 구함이 먼저 해야 할 일 아닌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나 서로 상대방 탓만 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보기 너무 흉해서 그렇다.

 며칠 전 세월호 유족들이 광화문 천막을 걷으며 했던 말이 생각난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언제든지 힘들면 청와대로 오라’고 하신 대통령님의 말씀을 믿고 이제껏 천막을 쳐놓고 만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결국 만나지도 못하고 지금 떠납니다. 이제 더 이상은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유족들이나 예전의 내 자신이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이 잘못이다.

 ‘언제든지 힘들면 청와대로 오라’는 말이나 ‘밥 한번 먹자’는 말이나. 그저 그런 흔하디 흔한 인사말이었던 게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