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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대가 연세대를 앞서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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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미국 스탠퍼드대는 1891년 문을 열었다. 연세대는 1885년 개교했다. 서로 나이가 엇비슷하다. 릴런드 스탠퍼드가 죽은 열다섯 살짜리 아들을 기리기 위해 스탠퍼드대를 만들었다면, 연세대는 고종의 명으로 어의(御醫)였던 H N앨런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세운 제중원이 모체다. 한때 이런 인연을 내세워 연세대가 스탠퍼드대와 자매결연을 시도한 적이 있다. 두 대학 총장이 만나 자기 대학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다음은 연세대 고위관계자의 고백이다. “솔직히 우리가 객관적으로 좀 밀리는 게 사실이죠. 그쪽은 노벨상 수상자도 20명에 가깝고,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문도 유명하고….그래서 우리도 나름 적지 않은 공을 들여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어요.” 그렇게 만든 연세대 프레젠테이션은 학교 자랑에 충실한 교과서였다. “유서 깊은 연세대는 한국에서 수능 상위 1%의 최우등 학생들이 들어온다. 역대 국무총리 ○명 배출, 장관은 ○○명, 국회의원도 ○○○명이나 나왔다. 지난해 사법고시 ○○명 합격, 행정고시 ○○명 합격, 회계사 ○○명 합격….”

 이에 비해 스탠퍼드대 총장의 프레젠테이션은 완전 딴판이었다. 우선 이 대학 출신의 후버 대통령이나 유명한 정치인·장관은 아무도 등장하지 않았다. 스탠퍼드대에 입학하려면 SAT 성적이 몇 점이나 돼야 하는지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 대학의 졸업생이나 교수들 가운데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명단도 찾기 어려웠다.

 스탠퍼드대 프레젠테이션에는 큰 숫자들이 하나씩 화면을 가득 메웠고, 총장이 그 숫자의 의미를 일일이 설명했다고 한다. “4만 개=1930년 이후 스탠퍼드대 졸업생들이 세운 기업 수입니다.” “540만 명=우리 대학 졸업생들이 창출한 일자리입니다.” “연(年) 2조7000억 달러=이 회사들의 총 매출액입니다.” 스탠퍼드대 총장은 잠시 화면을 정지시키고 나서 물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얼마입니까?” 연세대 총장이 “1조 달러를 좀 웃돈다”고 하자 스탠퍼드대 총장은 “와우! 대단하네요!”라며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은근하고 세련된 자기 자랑이나 다름없다.

 그러고 나서 프레젠테이션 화면에는 침묵 속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회사 이름들이 하나씩 흘러간다. 구글·야후·테슬라 전기차·HP(휼렛 패커드)·나이키·시스코시스템스·갭(GAP)·썬마이크로시스템…. 그 대열은 끝을 모르고 3분 가까이 계속됐다. 마지막으로 스탠퍼드대 총장이 결정타를 날렸다. “이 로고나 브랜드들은 우리 대학 출신이 만든 회사들입니다. 다만 졸업생들만큼이나 중퇴자들이 세운 회사들이 더 잘나가고 있다는 게 함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고, 스탠퍼드대가 도전해야 할 숙제입니다.”

 물론 이런 졸업생 띄우기는 스탠퍼드대의 고단수 비즈니스 전략일지 모른다. 여기에 힘입어 필립 나이트(나이키 창업자)가 1억500만 달러, 제리 양(야후 창업자) 부부가 7500만 달러를 통 크게 기부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스탠퍼드대는 9조원에 육박하는 기부금으로 하버드대를 눌렀다. 실리콘밸리가 달아오르면서 이 대학은 8년 연속 전 세계 대학들 중 기부금 1위를 차지했다. 당연히 기부금이 많을수록 대학은 선순환한다.

 얼마 전 삼성그룹이 공채 기준을 바꾸자 수십만의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고 한다. 요즘도 대학 캠퍼스엔 ‘행정·기술고시 합격’ 같은 축하 플래카드들이 자랑스럽게 나부낀다. 어쩌면 수능 세계지리 출제 오류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고시와 대기업 입사에 목매는 한국의 대학들과, 창의성을 북돋우고 창업을 응원하는 스탠퍼드대 간의 거리가 아득하다. 10년 후, 20년 후 두 나라의 경제격차가 얼마나 벌어질지 걱정이 앞선다. 대학부터 변해야 한국 경제의 앞날에도 햇볕이 들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연세대는 스탠퍼드대를 벤치마킹해 새로운 프레젠테이션을 검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기업 오너들이 상당수 고려대를 나와 포기한 모양이다. 앞으로 연세대가 어떤 창의적인 학교 소개 프레젠테이션을 궁리해낼지 기대가 크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