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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로 먹을까 해장으로 먹을까 히수무레 진짜 냉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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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호 34면

20대 초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가장 좋았던 게 평양냉면을 알게 된 일이었다. 상사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나를 미워했고 나도 그를 존경하지 않았지만, 그가 평양냉면 집에 데리고 갈 때 나는 늘 둘도 없이 싹싹한 사람으로 돌변했다. 처음 만난 2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100퍼센트 내 취향인 음식이!”라는 감탄을 멈출 수가 없다. 평양냉면을 내 인생에 소개해준 그 공만큼만 그를 덜 미워하게 되면서 식성은 미움을 뛰어 넘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윤정의 내맘대로 리스트: 평양냉면 찬가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일이 끝나면 내 머릿속 냉면 내비게이션이 뚜뚜 작동하며 인근 평양냉면집을 검색한다. 점심을 먹었든, 몇 km 떨어져 있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 사이에서 젊은 여자 혼자 앉아야 한다는 점도 가리지 않았다. 의정부는 성지순례처럼 여러 번 다녀왔다. 죽기 전에 전국의 유명 냉면집은 한 번씩 다 가볼 생각이다.

그러니 나의 냉면 사랑을 평양 옥류관에서 완성시키기 위해서라도 얼른 통일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요즘은 집 앞에 평양냉면계의 신흥강자로 부상한 식당이 생겨 일 주일에 적어도 한 번씩은 간다. 솔직히, 매일 가고 싶지만 참는 거다.

술 해장으로 냉면만 한 게 없고 심지어 안주로도 최고다. 그러니 술과 냉면을 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이틀 연속 사흘 연속 먹게 되는 수가 생긴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평양 냉면을 어떤 이들은 아주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취향’이란 것에 대해 겸손해졌다. 나만 먹기 아까워서 집안 어른들 대접하러 데리고 갔다가 구박만 잔뜩 받았다. 사람들이 “뭐 먹을래?”라고 할 때 나의 1순위는 이미 정해져 있지만 신중해야 한다. “평양냉면 어때?”라고 묻고 “아 그래 냉면 좋지”라고 대답할 때도 다시 한 번 차분하게 확인한다. “그냥 냉면 말고 ‘평양’냉면. 먹어본 거지? 좋아하는 거지?”

굳이 초보임에도 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끝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 제대로 몇 젓가락 뜨지 못하면서 “이게 당최…아무 맛도 없는 맹탕에 맹물도 아니고 밍밍한 게”라는 반응이 올 확률이 30%는 된다. 고기와 냉면 세트를 6000원에 판다는 프랜차이즈 식당이나 유명 식품회사 브랜드 인스턴트 냉면을 들먹이며 그것보다 못하다고 할 것이다. 그럴 때 들려주는 답변은 한 가지. “이게 한 번 맛들이면 끝장이야.”

그러면서 한 수 가르쳐 주는 거다. “밍밍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슴슴하다고 표현하는 거야.” 이러면서 백석의 시 한 줄도 읊어주면 좀 더 ‘있어’ 보이겠다.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매니어들끼리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냉면을 먹으러 갔으면 조용히 냉면 맛만 즐길 일이지 맛에 대해 또 상대방의 취향에 대해 언급해선 안 된다. ‘평양 냉면 매니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나름 미각과 맛집의 감식안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일단 냉면이 나오면 찬 육수를 벌컥벌컥 들이켜 맛을 본 다음 고춧가루만 뿌려 먹는다. 거기에 식초와 겨자를 뿌리든지 말든지, 혹은 계란을 냉면보다 먼저 먹든 나중에 먹든, 편육 고명으로 면발을 싸서 먹든 그냥 먹든 상관 안 한다. “이 평양 냉면이란 게 말이야”로 대화가 시작되면 메밀 함량, 동치미와 쇠고기 꿩 고기 국물, 갈아낸 얼음 육수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며 밥 먹는 자리가 불행하게 끝날 확률이 높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행여나 ‘평양냉면 집 4대 천왕’ 같은 주제가 올라왔다면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 하지만 이렇게 매니어 표시를 내는 일도 옛날 얘기가 되어간다. 평양 냉면의 자발적 최강 홍보대사 존박이 등장한 이후, 평양냉면은 정말 ‘애들도 다 먹는’ 음식이 됐다. 국가스텐을 몰래 좋아하던 골수 팬들이 ‘나는 가수다’ 때문에 그들이 누구나의 가수가 되자 이유없이 화가 나듯, 번듯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의 평양 냉면집이 속속 등장하고 더 먹기 쉬워졌지만 왠지 심통 부리게 된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진정한 매니어로 거듭나면 그것도 극복할 수 있다. 이제 겨울이다. 여름에 바글거렸던 흔한 냉면 손님들 때문에 존박을 원망한 사람이라면 혼자 한가로워진 식당에서 조용히 맛을 음미하면서 “냉면은 역시 겨울이지”를 외칠 때다.

이윤정 칼럼니스트. 일간지 기자 출신으로 대중문화와 미디어에 관한 비평 활동을 하고 있으며 중앙SUNDAY와 창간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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