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요직을 거친 이철희씨가|범행을 주도한 것이 문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교과서에 따르면, 검찰권 행사의 공정과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하여 개별사건에 대한 검사의 수사는 단지 최종적으로 검찰총장이 지휘 감독하게 되어 있고, 법무장관은 그 정치적 성격상 단지 행정적 감독만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검찰의 수사에 대하여 만일 정치적 배경이나 사회·경제적 영향력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답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검찰의 정치화를 부채질하는 결과가 생길 염려가 있다.
원래 정치적인 사건이나 그 주변인물이 관련된 사건에서 검찰수사의 공정을 기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사회·경제적 파급효과가 지나치게 크고 보면 검찰수사의 능력자체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검찰은 27명의 검사와 관계요부 1백30명을 투입하여 진상규명을 위해 불철주야 진력하여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일 이철희·장영자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하면서 어음사기의 점은 없다고 의견을 밝혔다가, 사채시장 마비로 사건을 덮어둘 수도 없고 배후 운운의 세론이 들끓자 어음사기관계와 배후 내지 방조적 인물에 대한 수사로 에스컬레이트 되어 1천8백1억원의 사기혐의사실이 확정되고 은행장들, 대기업의 총수들, 급기야는 영부인의 숙부까지 구속되더니, 최종적으로는 「장 여인 파동」이 「이철희 부부 거액어음사기사건」정도로 낙착된 것이다.
왜 검찰은 최초에 이다지도 분명한 사기사건을 단순한 외화도피와 불법소지로만 극소화하려는 인상을 주었을까. 수사확대과정에서 왜 대검의 중앙수사부장이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사태진전 때마다 검찰총장은 법무장관에게로, 장관은 또 보고하고 지휘를 받아야만 하였나.
아무리 사상 최대의 사기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검찰특별수사의 고위책임자인 대검중앙수사부장 선에서 수사방침이 결정되기에 부족한 것은 없다.
최종발표는 이 거액사기사건은 이철희 부부의 탐욕과 낭비벽에 비롯되었으나 오히려 음흉한 이중성격의 전 중정 차장 이철희가 권력층의 특혜로 해외합작회사를 만들어 재벌이 돼보겠다는 망상아래 장영자를 유혹하고 전 중정 간부들을 하수인으로 내세워 범행한 것으로 이철희가 주동한 계획적 조직적 사기사건으로 평가하였다.
전 중앙정보부의 기능이 국가안보를 담당하여 그 권한이 막강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 차장이라는 고위직이 조직적으로 수천억원을 사기하려 들었다면 공직자의 자질문제로 더 더욱 국가기강을 흔들어 놓은 셈이다.
여하간 사건은 막바지에 와서 이철희가 주범이요, 장영자는 하수인이고 은행장들은 출세욕과 돈에 눈이 멀어 특혜를 베풀었고 이규광은 1억원을 알선수재 하였으나 일당을 비호한 사실은 없는 정도로 마무리된 셈이다. 그러나 검찰 발표 중에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상당히 많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철희는 1979년 12월께 유정회 국회의원은 사직하였는데, 바로 그 때 권력의 특혜로 해외합작회사를 설립하여 정상급의 재벌로 부상하려는 망상을 품고 이규광의 처제인 장영자에게 접근, 유혹하였다고 하나 당시의 정국이 혼미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는데 정보통의 「계획적」범행의 실행치고는 지나치게 조급한 것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공영토건이라는 대기업의 사장이 단지 경영연수과정 동기생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 설령 전 중정 차장이었다고 하더라도, 2백억원이나 되는 돈을 연22%, 2년 거치 3년 분할상환조건으로 빌려주겠다는 말만을 듣고 4백억원의 어음을 발행할 정도로 믿게 된 이유는 진정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그는 1백69억원을 빌면서 2천83억원의 어음을 발행하여 주어 그 중 1천2백79억원의 어음은 편취 당하였고, 일신제강의 회장은 1백57억원을 빌었는데 1천3백97억원의 어음을 발행해 주었고 그중 1백15억원의 어음은 편취 당하였으며, 라이프주택은 2백억원을 빌면서 8백27억원의 어음을, 경남기업은 돈도 빌지 아니하였는데(?) 1백80억원의 어음을 발행하여 주었다는 내용이다.
대기업의 총수들이 「바보들의 대행진」을 장난삼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위의 외형상 이러한 기업경영주들의 행위는 법인에 대한 관계에서 업무상 배임죄룰 구성한다 하겠는데도, 공영토건 변강우에 대하여 32억원의 어음교부에 대한 업무상 배임만을 입건하였을 뿐인 점도 석연치는 않다.
81년2월부터 82년 4월까지의 1년2개월간의 세기적 사기 드라머를 통하여 주무른 돈이 5천7백55억원. 1백95억원어치 재산을 사고, 먹고, 입고, 남 주고 하여 49억원을 썼다니, 오 하늘이 무섭다. 여하간 그 사용처에 관하여 이번 국회보고에서는, 특히 증권투자손실 3백87억원이 주로 「주식선매」방식에 의한 융통으로 빚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왜 「주식선매」가 그토록 많은 손실을 보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데도 이해가 쉽지 않은 이유는 장영자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9백90원짜리 유공주식을 한 달 반 후에 넘겨주기로 하고 5백50원씩에 팔았을 것이며, 전영채는 이런 허황한 거래를 어떻게 믿고 29억5천만원의 돈을 주었겠느냐 하는데 있다고 본다. 추측컨대, 장영자는 신출귀몰한 주가조작을 해 왔었고, 전영채도 어떤 경위에서든 이를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장영자나 전영채나, 증권과 사채에 「바싹」한 사람이기는커녕 바보천치였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검찰발의는 「주가조작」을 하였다든가, 하려 했다든가 하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인상을 준다. 당시 또 다른 주가조작의 조직적 세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의혹을 풍긴다.
따라서 법무장관의 국회보고가 「이철희 부부 거액사기사건」의 보고형식을 취한 것은 형사범죄의 수사에 관한 것이라는 면에서는 적절하다. 또 한편 장 여인 파동의 근간은 형사범죄적 요소에 있다기보다 기업가의 비리, 금융의 무원칙에 가까운 부조리, 사채시장의 발호를 가져온 장·단기 금융정책의 부실 등 경제·금융정책상의 문제에 있고 나아가 힘에는 항상 약하고 법은 뒷전으로 물러앉은 지 오래인 우리네의 의식과 현실에 있다 아니할 수 없다.
장 여인 파동의 엄청난 부작용을 극소화하고 불신과 무력감에 빠져버린 민심을 수습하려면 사건의 진상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만 이제는 모두 잊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국가적 스캔들과 민심의 이탈을 가져온 스캔들을 다루는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쯤은 발동돼서 진상을 파헤치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