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3)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41)|통합 권투단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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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8·15 해방과 함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체제는 엄청나게 변화했으며 혼란도 극심했다. 체육계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으며 권투계도 혼란 속에 활기를 띠게 됐다. 해방이 되자 해외에 거주하던 프로복서와 관계자들이 속속 자유를 되찾은 조국으로 모여 들었다.
권투인들이 모이자 제일 먼저 착수한 사업이 국내 프로복싱의 통합된 단체를 만드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복싱이 기틀을 잡기 시작한 것은 1934년께였다. 이때까지 권투계는 아마와 프로의 구별없이 도장 중심제로 운영되다 단일기구의 창설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조선권투구락부(대표 성의경) YMCA(대표 이혜택) 경성권투구락부(대표 김동준) 선만권투회(대표 박은섭) 수원권투구락부(대표 서정훈) 등의 대표들이 모여 「조선 아마추어 권투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아마권투계가 집행기구를 확립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프로권투계도 이듬해인 1935년 「조선권투연맹」을 발족하게 된다. 이 연맹의 발족으로 프로권투의 프러모션도 정상궤도를 밟기 시작했다. 이 연맹의 발기 주역은 이상묵씨를 비롯, 최병하·박진순·홍준표·김정복·정혜원씨 등이었다. 특히 유도인이었던 이상묵씨는 황을수씨와 희문고보 동창으로 지난 51년 한국체육관 관장으로 부임, 76년에 이상균씨에게 물려주는 등 평생을 체육계에 몸담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들 권투기구도 다른 체육단체와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모든 경기가 중단되자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해방과 함께 숨통이 터진 것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귀국한 권투인들은 우선 도장 건립에 착수했다. 45년 11월께엔 수많은 도장이 난립되어 각기 관원 모집으로 법석을 떨었다. 이들은 일본인 재산의 건물을 적산으로 접수하여 도장을 설립했다.
을지로 2가의 서울권투구락부(관장 김명석) 낙원동의 고려권투회(관장 노병렬) 종로 3가의 신한권투회(관장 정복현) 용산경찰서 검도장을 접수한 용산권투구락부(관장 조성구) 마포의 제일권투회(관장 이영완) 노량진의 성남권투회(관장 양태윤) 을지로 입구의 국제권투구락부(관장 양도윤) 등 10여개의 도장이 난립했다.
이중 가장 큰 도장은 필자가 이사로 있었던 서울권투구락부다. 검도장 1, 2층 3백여평을 도장으로 개조하여 관원들도 상당히 많았다. 나는 당시 대한전선 자재과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친구인 김관장을 도울 겸해서 이사로 취임했었다. 이같이 수많은 도장의 난립과 함께 황을수가 상해로부터 11월 중순께 귀국하면서 프로복싱계에 활력을 불어넣게 됐다.
황을수는 귀국과 함께 프러모터를 하기 위한 모임으로 「전국권투협회」의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46년 4월 김명석·양도윤·박용진·박용만·정복현 등이 모여 또다른 단체인 「전국권투연합회」를 창설했다. 연합회는 협회와는 달리 구락부와 도장을 중심으로 『경성의 각 권투도장을 통할하여 지도하며 건전한 스포츠로 건국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를 내세우고 출범했다.
명동입구 한전건물 뒤에 사무실을 마련한 연합회는 희장에 문현승을 추대하고 김용기를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또 상무이사에 서광옥·심상욱·박용진, 이사에 김명석·정복현·이배기·박용만 등을 뽑았다. 당시 48세인 문회장은 김구가 주석인 한독당 청년부장으로 6·25 후 납북됐다. 또 김부회장은 조선권투구락부(관장 성의경)의 사범이었으며 박용진·노병렬·김명석·김유창 등과는 권투의 사제지간이다.
이같이 프로권투계가 두 단체로 나누어지자 주도권 쟁탈전이 심하게 벌어졌다. 권투경기는 주말에 개최되었는데 후원단체가 늘 달랐다. 연합회 산하단체가 주관하는 경기는 연합회가 심판 등 일체를 후원했고 협회 산하단체의 주관경기는 협회가 모든 일을 관장했다.
두 단체의 주도권 다툼이 심화되자 군정청 교화국 체육과가 중개에 나서 무조건 통합하기를 권유했으나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연합회의 심판장인 원로 김정복은 『비록 우리 권투계가 과도기에 있지만 분열이란 너무 비통하다』며 통합을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회측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김정복은 연합회에서 탈퇴, 협회쪽으로 가담해 버렸다. 김정복은 현재 미국에 이민가 있는데 5·16 후 한국권투위원회(KBC)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정복의 탈퇴 후 심상욱·서광옥·정복현 등도 잇달아 사퇴, 연합회는 치명적 타격을 받게 됐는데 특히 정복수의 실형인 정복현의 사퇴는 새로운 프로권투 단체의 탄생을 위한 기폭제가 됐다. 정복현의 사퇴로 그가 관장으로 있는 신한권투구락부가 주최하게 된 권투경기를 놓고 어느 단체가 후원을 하느냐는 문제가 일어났다. 이 문제를 계기로 프로권투계에선 자성의 소리가 높아져 결국 「조선프로권투연맹」이란 통합단체가 탄생하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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