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이 빚은 척박한 땅 일궈 … 주민들 땀과 눈물 고였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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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월정 마을 사람들은 빌레(넓게 퍼진 암반)를 깨뜨려 담을 쌓고 밭을 일궜다. 밭담길에서 제주 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엿볼 수 있다.

제주관광공사가 지난달 25일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을 개통했다. 제주시 구좌읍 해안의 김녕리·월정리 일대를 훑는 14.6㎞ 길이의 도보여행길이다. 화산섬 제주는 한라산·만장굴·성산일출봉 등 다양한 화산지형과 지질자원을 갖춰 201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이런 제주의 특성을 여행에 접목해 지역 경제도 키우고, 지질 명소로서 가치도 보존하겠다는 것이 지질트레일의 조성 취지다. 제주관광공사 최갑열 사장은 “지질트레일을 통해 지역 밀착형 생태관광을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용암의 흔적을 걷다

현재 제주 지질트레일은 모두 세 개 코스가 있다. 2010년 ‘수월봉 지질트레일(11.9㎞)’이 처음 열렸고, 지난 4월 ‘산방산·용머리 지질트레일(28㎞)’이 두 번째로 개통됐다. 지난달 열린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이 세 번째 코스다. 내년에는 성산 일출봉 지질트레일이 개통될 예정이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은 마을 안쪽을 걷는 ‘드르빌레길(9.1㎞)’과 바닷가를 따라 걷는 ‘바당빌레길(5.5㎞)’로 나뉜다. ‘드르’는 들, ‘바당’은 바다를 일컫는 제주 방언이다. 바다를 낀 바당빌레길은 사실 올레꾼이 먼저 점령한 자리다. 바당빌레길이 2년 전 개통된 제주올레 20코스와 겹쳐 있다.

김녕·월정의 땅에는 수만 년 전 역사가 새겨져 있다. 해안으로 투물러스(용암언덕)가 방파제를 치고, 용천동굴·당처물동굴 등이 땅 속에 숨어있다. 모두 용암이 빚은 역동적인 풍경이다.

동굴 위 빌레(넓게 퍼진 암반)에 터를 잡은 탓에 김녕과 월정 마을은 예부터 살림이 궁했다. 바람이 거센데다, 빌레가 많아 농사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다. 딱딱한 바위 땅인 빌레를 깨뜨려 담을 쌓고 밭을 일궜다. 척박한 환경과 맞서 싸운 이곳 주민의 땀과 눈물이 고여 밭이 됐다.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걸어 보니

① 김녕·월정에는 용암이 흐른 뒤 생성된 굴이 많다. 그 중 맑은 용천수가 솟는 게웃샘굴 모습. ② 썰물 때만 모습을 드러내는 김녕 청굴물.

김녕어울림센터가 코스의 기점이다. 해변을 따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환해장성을 비롯해 투물러스·조간대 등이 보인다. 청수동 끝자락 청굴물에서는 김녕 주민이 살아온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청굴물은 만조 때 바다에 완전히 잠겼다가 썰물 때 드러나는 굴이다. 바닷물이 빠지면 인근 게웃샘굴에서 흘러든 차디찬 용천수가 솟는데, 여기에서 주민들이 목욕을 했단다.

조른(좁은)빌레길부터 월정리사무소까지 5㎞ 길은 빌레 천지다. 조른빌레길에서는 빌레와 밭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본래 빌레였던 자리를 깨 밭으로 이어붙였는데, 군데군데 깨지 못해 남은 빌레가 섞였다. 빌레 깬 자리에서 돋아난 마늘마다, 얼기설기 쌓아올린 밭담마다, 마을 주민의 억척스러운 삶이 읽힌다. 진(긴)빌레길로 들면 더 너른 빌레지대가 나온다. 너무 두꺼워 개발하지 못한 자연 그대로의 빌레다.

드르빌레길 최고의 전망은 진빌레길에서 월정밭담길로 넘어서는 길목의 정자에 있다. 김녕과 월정 지역 95%가 경사도 5% 미만의 평지여서 조금만 언덕진 곳에 올라도 사방이 훤히 보인다. 푸른 밭과 밭담의 풍경은 멀리서 볼 때 한 폭의 수채화가 되고, 조각보가 된다. 그러나 돌담을 그저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이라 말하긴 힘들 것 같다. 밭담을 따라 걷는 내내, 용암 위에서 삶을 일군 제주 사람들의 땀과 굽은 등이 마음에 걸렸다.

●여행정보=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코스는 모두 14.6㎞로, 다 걸으려면 5시간은 족히 걸린다. 코스 대부분이 평지여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다. 길 곳곳의 안내표지판과 리본이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3개의 지질트레일 코스를 모두 여행하려면 최소 4일은 잡아야 한다. 숙소는 중간 지점에 잡는 것이 이롭다.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사려니힐링랜드(064-783-7832)가 각 코스와 자동차로 1시간 거리 안에 있어 동선 짜기가 수월하다. 제주관광공사 융복합사업단 064-740-6971.

글=백종현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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