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9)<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37)|김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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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으로부터 돌아오고 해방을 맞은 정복수는 충무로 3가에 신한 권투회를 설립했다.
정복수의 명성 때문에 우후죽순 격으로 난립한 권투구락부 중 신한은 꽤 유명했다. 사실 이 신한 권투회를 만든 것은 정복수의 형인 정복현이었다.
정복현은 장사를 하여 돈을 꽤 벌었으며, 6·25까지 양은 도매상을 크게 벌여놓고 있었다. 정복현과 손을 잡은 사람이 그의 친구인 서광옥이며, 서광옥은 그후 5, 6년 동안 프러모터로 크게 활약한 인물 중 하나가 된다.
정복수는 해방 후 중국상해로부터 돌아온 송방헌 박형권, 그리고 국내파인 조성구 서재석등과 더불어 프로복싱 재건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일본을 풍미한 동양 최강의 철권에 대한 국내 팬들의 호기심과 인기는 식을 줄 몰라 정복수가 나타나는 링은 항상 대 성황을 이뤘다.
특히 정복수의 대 송방헌, 대 박형권 경기는 「동양3대 권투왕」의 대결이라 하여 대인기였다.
해방되던 해 정복수는 25살이 되어 복서로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나 46년7월 불도저라는 별명의 터프가이인 싱가포르 챔피언 김옥현을 3라운드 도중 링에서 기어 내려가게 만들고 그 직후엔 박형권을 맹타(10회 판정승)하여 건재를 과시했다.
그러나 정복수는 40년대 말부터 노쇠현상을 보이며 생계를 위해 무리하게 경기를 벌이는 「서글픈 복서의 말로」를 걷게 된다.
분명 비범한 파이터였으나 정복수는 시대를 잘못 만난 셈이다. 약 2년 반 동안 일본을 휘저은 철권이었으나 그때의 사회상이 혼란한 때라 프로복싱의 흥행이 퇴조, 정복수는 명성만큼 돈을 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천성이 다혈질인 정복수는 두주불사의 애주가였으며 수입이 빠듯한 만큼 절제할 줄을 몰랐다. 46년에 결혼했으나 가정을 알뜰히 보살피지 않았다.
돈 때문에 자신의 명성을 변칙적인 방법으로 판 일이 46년 8월에 있었다.
서울운동장 수영장은 이날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정복수와 김기환의 대결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복수는「링의 왕자」요, 김기환은「거리의 주먹왕자」였으니 세기의 격투기 대결이라 할만했다. 김기환의 세컨드가 직계후배인 김두한이었다.
사각의 링 위에선 아기자기(?)한 백중의 열전이 거듭되어 순진한 관객들은 환성을 자아냈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무승부로 끝나 두 선수 모두 명성을 보존했다.
그러나 이 대전이 각본에 의한 쇼였다는 것이 뒤에 알려진 얘기다.
신한 권투회가 해방 1주년을 기념하여 마련한 이 대전을 앞두고 정복수와 김기환은 며칠동안 밤늦게 신한 권투회에 단 둘만 남아 스파링을 벌었다. 손발을 맞춘 것이다.
이 연습이 주효하여 이 땅에서 최초라 할 복싱쇼를 벌인 것이다.
실력대로 싸운다면 글러브를 낀 복싱인 이상 정복수를 당해낼 김기환이 아니었다.
저돌적인 인파이더는 많이 맞을 수밖에 없다. 정복수도 상승의 복서였으나 승리까지는 무수한 매를 맞아야 했다.
그래서 한번 경기를 치르고 나면 술로 피로를 달래는 습성이 생겼다.
한번은 군산지방을 원정 중 혼자서 밤늦게 술을 마시러 나갔다가 술집에서 크게 취한 채 작부의 서방이라 자칭하는 사람에게 무수히 얻어맞기도 했다. 그 정도로 정복수는 술로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망치고 있었다.
나이 30을 넘기고도 호구지책으로 전란의 전국을 순회했던 정복수는 53년5월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조성구와 대결했다. 조성구와는 52년 후 서울 대구 광주 원주 목포 등을 순회하며 이미 9차례나 대전했다. 그래서 노장과 소장의 호적수 대결이라 하여 일련의 연속대결이 퍽 흥미를 끌었다.
백열전을 거듭하다 5라운드에 접어들었을 때 정복수는 특유의 수법 그대로 맹렬한 돌진을 거듭했다.
조성구는 기회를 노리다 한번은 사이드 스텝으로 슬쩍 피했다. 정복수는 예기치 못한 목표 상실에 스스로 제동을 걸지 못한 채 링 밖으로 다이빙하고 말았다.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박아 실신, 크게 다쳤음은 물론이다.
그러고도 병원을 다녀온 정복수는 술을 찾았다.
이 직후 정복수는 링을 떠났고 장사 실패와 신병 등의 불운을 술로 달래다 마산국립결핵요양소에서 2년여 투병생활도 보람없이 62년 4월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42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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