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2)『반민 특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8·15해방 후 친일파들은 일단 숨을 죽였다.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차가운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사실 억눌려 살아온 민중들에겐 포악한 일본 군국주의자들 못지 않게 경력을 배경으로 이웃을 매장한 친일파에 대한 한이 맺혀 있었다. 그 뒤에 8·15직후 곧장 건국 준비 위원회란 이름으로 조직에 착수한 좌익집단은 친일파 숙청을 선동했다. 이 때문에 처음 한동안은 일부지역에서 친일파에 대한 집단보복이 행해졌다. 그런 대표적 사건은 광주에서 있었다.
45년 9월 중순. 광주 서중 운동장에서는 광주 청년단 주최로 해방 축하기념 운동회가 열렸다. 운동회가 끝나고 군중이 교문을 나설 무렵 누군가<저기 강홍섭이가 간다>고 외쳤다. 강홍섭은 일제 때 고등계 형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쪽저쪽에서<저놈 잡아라>란 고함이 터지고 군중들은 그를 잡아 린치를 가했다. 군중들의 무참한 뭇매에 강 형사는 그 자리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산 뺏어 자금조달>
좌파도 그랬지만 우익 청년 단체들도 친일파의 재산을 활동자금으로 이용했다. 민족에 대한 반역의 보상으로 독립운동에 재산을 바치라는 것이었다. 청년단체들 중에서는 친일파를 난폭하게 다뤄 재산을 뺐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씨의 회고가 이런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해방직후 모모 군사위회, 학병동맹, 지원병 출신 동지회 등등 무려 30여개의 군사단체가 창설되었다. 학병동맹을 제외하고는 각 군사 단체에는 명망있는 분이 위원장으로 있었으나 그 명망있는 위원장의 이름을 팔아 그 부하들은 자금을 조달하는데 공갈·협박 등의 수만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하지」장군은 나에게 그러한 군사단체들을 전부 해체시키도록 요망하였다….
즉 45년12월말께 모 군사단체에 속하는 간부들이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운현궁과 한상용씨 저택, 김계조씨 저택 등을 접수했다. 특히 한상룡씨의 경우 그 집 식구들을 모두 지하실에 감금시켜놓고 위협·공갈을 하였다. 이런 보고를 정한 나는 강력한 조치를 취하여 그들 접수자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원상 회복시켜 주었다. 나는 그 군사단체에 속하는 간부들에게 「친일파들은 앞으로 반민족 행위자로 반드시 법적 조치가 있을 것인데 그 법적 조치의 절차를 밟지 않고 친일파라고 해서 덮어놓고 그들의 사유재산을 침해, 점유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주요 정당들도 그들의 정강정책에 반민족 행위자 처벌을 내걸었다.
상해임시 정부도 환국하기 2개월 전인 9월3일 중경에서 발표한 당면 정책 14개항 속에서<독립운동을 방해한 매국족은 공개적으로 처단할 것>을 명백히 했다.
그러나 미군정·한민당,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친일파 처벌을 내걸지 않았다.
한국 주둔 군사령관「하지」는 9월12일 한국정치·문화단체 대표 6백명을 대상으로 한 부민관에서의 연설에서<총독부는 조선을 착취한 기관이지만 당분간 사용할 기관이 없으므로 이 기구를 사용하겠다>고 했다.
미군정 당시 재무부 예산국장을 지낸 이병호씨(국제 로터리 한국 총재단의장)는『45년12월께에도 예산과에 한국인은 얼마 없고 일본인들이 그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46년1∼2월까지도 일본인들이 행정을 맡았다』고 회고했다. 일본인이 돌아간 뒤에도 그 자리는 일제하의 한국인 관리출신들이 이어 받았다. 특히 국내의 정치혼란 때문에 치안이 어려워지자 미군정은 독립지사를 체포, 고문한 고등경찰도 모두 눌러앉게 했다. 한국 정당들은 경찰 인사를 여러차례 문제 삼았다.
송남혜씨(과도 입법의원·김규식의장 비서실장)의 회고.『46년9월말의 용산 철도 종업원 파업, 그리고 잇달아 대구 10·1폭동이 일어나자 좌우합작 위원회에서 미군정 측에 회담을 제의했다. 10월23일 열린 회담에는 미국 측에서「러치」군정 장관·「브라운」미소 공위 미국 측 대표 등이, 한국 측에서·김규식·여운형·원세동·안재홍씨, 그리고 나도 배석했었다.
이 회담에서 정당 대표들은 10·1폭동은 공산당의 폭력전술에 따라 일어났지만 미군정에 대한 민심 이탈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특히 한일 애국자를 탄압한 일제의 고등경찰이 군정 경무부 간부로 남아 백성을 고문하는 등 행패가 심한 것을 시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이 항의는 채택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조병옥 경무부장의 회고.

<좌익 폭도들 행패>
『대구의 10·1 폭동은 좌익 폭도들이 대구와 그 주변의 경찰관서를 점령하고 경찰관을 살해한 사건이다. 영천같은 곳에서는 군수를 장작 더미위에 올려놓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후 임정파 등 중간파들이 경찰 인사를 비난하기에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신들은 경무부장인 이 조병옥이가 친일 경찰을 등용해 민심을 이탈했다고 하지만 친일파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가령 창씨개명을 주장한 7인조 같은 사람은 Pro Japanese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밖의 대부분은 직업으로서 일제관리를 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항일 운동을 한 민족지도자로 자처하지만 과연 떳떳한가. 여운형 안재홍씨 두 분은 일본군이 마닐라까지 점령하자 총독을 찾아가 대동아 전쟁에 협력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고 맹세하지 않았는가. 김규식 선생도 아들이 일본 해군의 스파이로 8년간 활동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나는 끝까지 항일의 지조를 지켰지만 그러면서도 영달을 위해 민족 운동자를 살해하고 억압한 자 외에는 경찰관 출신자를 Pro Jobdm으로 인정하고 국립경찰로 등용했다. 이런 나의 해명이 있자 여운형씨는 자리를 슬그머니 일어서 나가버렸고 안재홍씨는 묵묵부답이었으며 김규식씨도<더 잘해 달라는 부탁뿐 달리 할말이 없다>고 했다나
남조선과도 입법 의원도 반민족 행위자 처벌법 제정을 추진했다. 입법의원 선거법에서<중추원의 부의장·고문 및 참의><중앙 및 도의 자문의원><고등관><판 임관급 이상의·경찰관 헌병·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이었던 자와 그 밀정>등은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이 법안은 미군정도 받아들여 47년9월3일 공포됐다. 이어 입법의원은 민족 반역자 처벌법도 제정했다.
공민권 제한에서 사형에까지 이르는 준엄한 심판법이었다. 이 법안의 심의도중 목포출신의 이남규 의원은『이완용을 매국노라 할지 알 수 없지만 내 소견으로는 부득이한 국제 정세 아래서 한일합방에 서명한 것』이라며 친일파 처별을 반대해 회의장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결국 이 의원은 사과하고 1개월의 정직처분을 받았다. 이후 이론없이 법안은 통과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 법안을 비토했다. 『민족적 의지에 배반되는 반역적 의도의 친일분자 처벌 원칙은 이해하지만 이런 종류의 법률은 전 민족의 뜻, 즉 선거를 통한 의회에서 나와야한다』는 것이「헬멕」군정장관 대리의 거부 이유였다.
결국 친일파 처벌은 독립후의 과제로 떠넘긴 처사였다. 사실 미군정은 친일파를 손 떨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보다는 친일파를 더욱 중요했다. 경찰의 경우 이 현상은 두드러졌다.
사실 일본 경찰 출신들이 해방 후의 경찰을 그대로 장악한 것은 불행한 사태였다.
그러나 이 사태는 8·15이후의 혼란이 낳은 부산물이었다. 좌익은 도처에서 국민을 선동했다. 그리고 점차 파업·방화·살인으로 그들의 폭력 전술을 격하시켜 갔다.
여기에 대처해 질서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경험있는 경찰이 필요했다.
그리고 실지로 정보 수집과 분석의 베테랑들인 고등계 출신 경찰 등이 좌익의 음모에 대응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군공 경찰은 점점 더 일제 경찰로 틀을 잡아갔다.

<친일파 포섭 나서>
국내 민족진영을 대표한 한민당은 친일파롤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좌익에 대응하고 그 세력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였다.
이승만 박사 역시<우선은 힙을 뭉쳐야 하며, 친일파 문제는 주권 회복 후 우리 손으로 재판해야할 것>이라는 소극적 자세를 보였다.
11월5일 돈암장에서의 기자단과의 1문1답.

<문=통일이라는 중대한 민족적 사업에 썩은 분자, 즉 민족 반역자나 친일파가 끼어있다고 하면 큰 일이다. 그런데 조선 사정에 어두운 미군의 군정을 보좌하는 요직이나 또는 정치운동전선에 나서서 뻔뻔스럽게도 활동을 하는 자들은 대개가 그러한 불순분자들이다. 중앙 협의회의 구성원에 만약 불순분자가 어느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은 선생 자신의 총명을 흐리게 일인데 각별 주의해야 할 줄 믿는다.
답=물론 민족반역자나 친일파는 일소하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놓고 볼일이다. 그러한 불순분자를 지금 당장 외국인의 손으로 처벌하여 주기를 우리는 원치 않는다. 우리의 강토를 찾아낸 후에 우리의 손으로 재판하여야 할 줄 믿는다.
문=통일과정에 있어서 그러한 분자들이 들어가 통일을 방해하고 연합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그르치게 한다면 이것은 큰 비극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첫째 문제가 이들의 숙청에 있다고 믿는다.
답=지금은 누가 친일파고 누가 반역자인지 모르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