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타임] 전업주부? 뒤치다꺼리 지겨워 앞치마 풀고 포상휴가 좀 갈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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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야, 그럼 200원 줄 테니 다녀와 보던지'라고 하는 거야, 글쎄."

얼마 전 친구가 흥분하면서 한 말이다. 결혼 15년을 맞아 혼자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하자 남편이 대뜸 그렇게 대꾸했다는 것이다. 학교 다니는 애를 둘씩이나 두고 혼자 여행을 가겠다니 그 남편에겐 설마 싶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했으리라. 하지만 친구는 동행할 선배도 미리 구해 놓은 터라 물릴 수가 없었다.

사실 주부가 혼자 여행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길목마다 따라붙는 세인의 불필요한 관심이 문제다. 친구의 아이들은 생각보다 쉽게 수긍했다고 한다. 어려운 쪽은 오히려 남편. 마음의 때를 씻어내고 오겠다며 친구는 며칠을 설득한 끝에 겨우 남편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떠났다.

2박3일 동안 친구는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밤새워 얘기하고, 낮이면 낯선 시골 장터를 누비고 다녔다. 오직 자신만 생각했고, 보이고 느껴지는 것에 마음껏 취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친구는 만나는 사람마다 "저 휴가 다녀왔어요. 남편이 포상휴가 보내 줬거든요"라며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무엇이 친구를 '가출'하게 했는지, 같은 주부로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누군들 한번 떠나보고 싶지 않을까. 살다가 매 맞듯 마음을 다쳐 휘청거릴 때, 혹은 너무 지쳐 탈진할 때…. 생활이 갈등과 스트레스의 연속인데 주부라고 봐주고 비켜가진 않는다. 철 지난 광고처럼 "힘내세요, 당신에겐 가족이 있습니다"라는 한마디에 모든 걸 날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한가.

포상휴가, 정기휴가, 출산휴가, 생리휴가…. 세상엔 온갖 휴가가 있지만 전업주부에게 주는 휴가는 따로 없다. 인구가 줄어든다고 난리인 나라에서 2세들을 낳아 기름으로써 사회에 공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주부휴가를 얻기 위해 파업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누가 주지 않으면 스스로 챙겨야 하지만 생활에 얽매인 입장에선 쉽지 않다. 하루라도 집을 비우면 집안이 엉망이 될 것 같다. 이럴 땐 주부 파업을 가장 두려워할 사람(누구겠는가)이 먼저 휴가비를 주며 살짝 등을 떠밀어 주는 건 어떨까. 주부가 없는 며칠간 가정이 올스톱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위정숙(주부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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