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올라라, 여름이여 내 아이스크림이 간다

아침 출근 길에 나선다. 날씨가 덥다. '음, 오늘은 좀 팔리겠어'. 혹 흐리거나 비라도 내리면 얼굴부터 찌푸린다. '이런 젠장'. 직업이 가져다 준 습관은 참 무섭다.

아이스크림 관련 일을 하고부터 생긴 직업병은 이것만이 아니다. 수퍼마켓을 지나칠 때면 꼭 아이스크림 쇼케이스를 들여다보고 가기, 길을 가다 사람들이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 이름 알아맞히기, 혹 무슨 아이스크림인지 잘 모를 경우 생각날 때까지 그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뚫어지게 바라보기 등등. 심지어 길에 떨어진 처음 본 제품을 주워 온 적도 있다. 이러다간 쓰레기통까지 뒤지지 않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시작하긴 쉽지만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이 마케팅 업무다.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배운 마케팅 관련 서적은 아마 20년 뒤 사장이나 판매담당 이사가 됐을 때나 다시 꺼내 볼 듯싶다. 실제는 너무나 달랐다. 광고.프로모션이 마케팅의 전부인 양 착각한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오히려 숫자로 일한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전체 시장의 판매 추세는 어떻게 이뤄져 가는지, 각각의 제품에 대한 판매 현황은 어떤지, 그 제품을 계속 생산할 것인지 단종할 것인지, 신제품 출시할 때 제품의 수익성은 어느 정도인지 등의 통계는 기본이다. 여기에다 제품 개발에 투자가 필요하다면 투자 가치는 얼마나 되는지, 추후 제품 각각에 대한 판매 할당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따지다 보면 수치가 업무의 대부분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브랜드 매니저는 한 제품의 출시에서 단종까지 전 과정을 관리하는 역할이다. 새 제품을 개발하려면 네이밍과 컨셉트를 정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시장조사에 투자한다. 여러 곳에 가서 각종 샘플을 먹어 본다. 사무실 밖으로 다니며 맛있는 것 많이 먹는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구두 신고 하루 종일 다녀 보라. 얼마나 발바닥이 쑤시고 다리가 아픈지.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샘플을 먹어 보라. 속이 얼마나 불편한지. 튼튼한 내장과 단단한 다리는 브랜드 매니저의 필수조건이다.

시제품을 가지고 이에 대한 반응을 조사하러 다니기도 한다. 과자는 쇼핑백에 살짝 넣어 가면 그만이지만 아이스크림은 다르다. 드라이아이스를 잘 채워 넣은 아이스박스를 들고 다니며 모르는 사람 붙잡고 설문조사할 때는 얼마나 민망한지 모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돌아다니고 끼니를 거르기 일쑤인데 살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혼 적령기의 처녀가 아침마다 수영장을 찾는 것은 맞선용 몸매를 위해서가 아니다.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우리 회사는 연간 30~50개의 아이스크림 신제품을 출시한다. 이번 여름에도 약 30개의 제품이 새로 나왔다.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친구들과 약속 잡기도 힘든 때다. 아이스크림 장사는 여름만 바쁘지 않으냐 하면 역시 오산이다. 난방이 잘 되다 보니 요즘에는 겨울에도 아이스크림을 찾는 사람이 많다. 겨울과 봄은 여름 성수기 제품 준비하느라 바쁘고, 여름과 가을은 겨울 비수기 제품 준비하느라 바쁘다.

입사 2년째지만 물론 걱정도 없지 않다. 함께 아이스크림 분야를 맡았던 선배가 최근 느닷없이 직장을 떠났다. 3년 동안 아이스크림을 시식하다 6㎏이나 늘어난 몸무게가 부담스럽다며 다른 곳을 찾겠단다. 가끔 투덜대긴 하지만 나는 아직 아이스크림이 너무 좋다. 지금은 돈도, 승진도 욕심이 없다. 다만 맡고 있는 이 일에만 욕심을 가질 뿐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브랜드 매니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것, 어렵고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이미 체력은 준비됐으니, 용기까지 갖춘다면 정말 제대로 된 마케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주5일 근무 첫날인 지난 토요일에도 혼자 회사에 출근해 샘플과 파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내 자식 같은 아이스크림이 제일 많이 팔리길 기도했다.

부디 올해 여름이 화끈하게 길어지길 소원한다. 장마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노현진 해태제과 브랜드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