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길「사채파동」|최우석<편집부국장 겸 경제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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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장 여사의 대화파동을 보고 특히 3가지 점에서 놀랐다.
가장 먼저 그 웅대한 스케일이다. 단위가 잘못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모두가 스케일이 크다. 집에서 쏟아져 나왔다는 40만 달러의 외화만 해도 보통사람으로선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그토록 외화 바꾸기가 까다로운데 현찰로 미화 40만 달러라니 무슨 요지경을 보는 것 같다.
굴린 돈의 규모를 들으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얼마를 굴렸느냐에 대해선 설이 구구한데 줄잡아 1천억 원은 넘는 모양이다. 2천억∼3천억 설도 나오나 그건 아예 상상이 안 된다.
무슨 큰 기업을 한 것도 아니고 돈 잘 번다는 해외건설을 한 것도 아닌데 1천억 원이 넘는 돈을 주물렀다는 것이다.
물샐틈없는 것 같은 우리 사회에 이토록 도도한 돈의 흐름이 있다니 경이롭다.
그러나 나이 40도 안 된 한 여인이 그 콧대높은 은행을 비롯하여 증권계·기업 계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은 스케일만은 듣기에 시원 스럴 정도다.
또 주고받은 어음이 한 장에 몇 10억 원이니 몇 백 억 원이니 하는데 이것도 한 자리 숫자로 왜소하게 된 요즘 같은 때에 일진청풍이 아닐 수 없다.
다음엔 착상의 기발함에 혀를 내 두 룰 만하다.
먼저 은행에 거액의 예금을 하여 기선을 제해 놓고 예금을 빌미로 대출을 받고 그 대출 받은 것을 다시 예금하고 또 대출 받고…하여 스스로 신용창출을 한 것이다. 은행·기업들을 공깃돌같이 능수 능란하게 굴러가며 돈을 불려 나간 솜씨는 가히 신기에 속한다.
이 돈을 굴릴 때도 빌려준 이자는 이자대로 받고 담보로 받은 어음은 돈으로 바꾸어 증권투자까지 했다 한다. 그동안 1천억 원이 넘는 돈을 한치의 착오도 없이 풀 가동시킨 정확·정교성은 금융능률화의 극치다.
더러는 견 질이란 명분으로 빌려 꾼 돈의 2배까지 어음을 받아 활용했다 한다.
그것도 내노라 하는 기업들을 상대로 해서이다. 백전노장의 기업인들에게서 빌린 돈의 2배까지 어음을 받아 내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어음을 다시 활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재의 극치를 터득했다 할 것이다.
뭐 어렵게 공장을 돌릴 필요도 없이 또 세금에 속 썩을 필요도 없이 가만 앉아 돈버는 방법을 창안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이렇게 손쉽게 또 왕창 돈버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동안 불경기에 허덕여 온 많은 기업인들이 무릎을 치면서 스스로의 생각이 짧았음을 한탄했다는 후문도 있다.
마지막으로 금융기관의 자비로움에 대해 새삼 놀랐다.
무슨 일이 터졌다 하면 은행이 감초처럼 끼여 덥석덥석 제 살을 잘라 내는 손해를 본다. 연체된 12만5천 원을 받기 위해 1천만원이 넘는 집까지 가차없이 경매하는 곳이 은행인데 어떻게 이렇게 선심을 썼나 하고 놀랄 지경이다. 은행도 스케일이 큰 사람엔 약한가 보다.
이번에도 5개 시은 중 한 은행만 빼고 모두 크고 작건 손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또 장 여사가 그토록 대담·정교하게 사설금융업을 벌이도록 은행들은 무얼 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동안 금융풍토혁신이니 금융산업 현대화니 하는 말들을 자주 들어왔는데 돈이 급한 기업들이 은행보다 장 여사를 먼저 찾아가도록 해 놓고 무얼 혁신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 유 수의 기업들이 이번 사채파동에 줄줄이 걸려 든 것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돈을 제일 잘 번다는 건설업체들이 많이 걸렸다는 것은 우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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