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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함정 10년간 '짝퉁 방열팬' 썼다

중앙일보

입력

값싼 대만산 방열 팬(fan)이 고가의 프랑스산 제품으로 둔갑해 10여 년간 우리 해군과 육군의 주력 무기에 쓰여온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군은 경찰 수사 전까지 이런 사실을 파악조차 못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4일 ‘짝퉁 팬’을 만들어 방위산업체에 납품한 혐의(사기)로 N사 대표 이모(50)씨를 구속하고 직원 정모(32)씨 등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1999년 프랑스 E사의 발열 팬에 대한 국내 독점 판매권을 확보한 뒤 방산업체에 납품해 왔다. 그런데 국방기술원과 국방연구원이 2004년부터 대부분의 군수물품에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정받는 E사의 발열 팬을 쓰도록 설계도면을 작성하면서 이씨의 독점 시장이 만들어졌다. 연간 매출은 40억원까지 올랐다. 그러던 중 이씨는 2004년 프랑스산 방열 팬보다 가격이 세 배가량 싼 대만 D사의 제품을 접하게 되면서 짝퉁 팬을 납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후 그는 E사 제품의 수입을 중단하고 대신 D사의 방열 팬을 들여왔다.

 이씨는 위조 라벨까지 붙인 뒤 개당 4~6달러짜리 대만산 방열 팬을 12~50달러에 달하는 프랑스산으로 둔갑시켜 방산업체 32곳에 납품했다. 이 같은 10만여 개의 짝퉁 팬은 윤영하함의 위성통신장비를 비롯해 인천함(2500t급) 수중음파탐지기, 천왕봉함(4500t급) 장착 레이더 등 우리 군의 주력 함정에 그대로 쓰였다. 또 육군 K-9 자주포의 탄약 운반차량과 전기전자장치 성능 실험장비 등에도 장착된 것으로 조사됐다.

 이씨의 짝퉁 팬은 민간통신사인 KT가 전국에 설치한 중계기 1만4000여 대에도 들어갔다. 이씨는 방수 기능이 없는 팬이 설치돼 하자 보수 요청이 잇따랐을 때에도 또 다른 가짜 팬으로 교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조사결과 이씨는 이런 수법으로 10여 년간 14억여원을 부당하게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군은 설계와 다른 짝퉁 팬이 쓰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얼마나 잦은 고장을 일으켰는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군사기밀을 이유로 경찰에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위·변조된 보증서가 첨부된 부품이 10년간 납품됐는데도 기본적인 검증조차 이뤄지지 않는 등 방산 부품 관리시스템에 허점이 노출됐다”며 “군과 방위사업청에 가짜 팬에 대한 정확한 실태 조사를 의뢰한 상태”라고 말했다. 

수원=윤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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