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勞組시대] 1. 투쟁이냐 교섭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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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장기 노사분규가 끝난 지 한달여 되던 지난달 23일 경남 창원시 귀곡동 두산중공업.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분규 후유증에 시달리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 임원은 분규 탓에 수주량이 크게 줄었다는 사실이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신용평가기관과 은행에서 예의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분규 당시에는 회사 입장을 상세하게 설명하던 그였지만 최근엔 말을 아끼고 있다. 하지만 노조에 대해서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분규가 해결된 뒤에도 노사 간에 대화가 잘 안됩니다. 툭하면 (노조가) 정부 당국자를 찾아가 회사에 압력을 가해달라고 매달립니다. 요즘엔 합의사항까지 뒤집곤 해요."

이날 박방주 노조지회장(금속노조 두산중공업 지회)은 회사를 비웠다. 그는 금속노조 사무실에서 향후 사측에 어떻게 대응할지 금속노조 측과 상의하고 있었다.

"평화선언이라도 하고 회사 살리기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하고 싶어도 상급단체에서 징계한다고 해 현재로선 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3월 발생한 두산중공업 사태는 앞으로 5년간의 노사 관계 흐름을 정하는 중요한 고비였다고 노사 모두 생각하고 있다.

정부 중재로 사측이 대폭 양보를 한 것은 다른 노사분규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이미 불법 파업에 대한 사측의 법적 대응수단인 가압류.손해배상청구소송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예외'로 규정했지만 노사 모두에 확실한 전례가 돼버렸다.

두산 사태를 취재하던 한 외국 특파원은 "완강하던 사측이 그렇게 쉽게 밀릴 줄 몰랐다"며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힘의 변화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노동계도 자신에게 기우는 힘을 자각하고 있다. 4월 만기 출소해 현업에 복귀한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은 "지금까지는 정부가 노동계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도 이 같은 '노.정의 밀월 관계'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 올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노동분야의 한 위원은 "조흥은행의 매각을 미뤄주면 한국남동발전의 민영화를 양보하겠다"고 경제 담당 위원들에게 제의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조흥은행 노조를 방문했으니 조흥은행만큼은 노조의 의견을 존중해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새 정부의 노동 정책도 결국은 노조를 의식해 그때그때 모습을 바꿔가는 정치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부는 노사 관계를 '상생(相生)의 관계'로 발전시키겠다고 하지만 이런 상태라면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친노동정책을 배경으로 노조는 더욱 공세적으로 나오고 있다.

처음으로 산별교섭을 하기로 한 금속노조의 경우 파업 날짜를 오는 6월 중순으로 미리 정해놓고 이로부터 역산해 교섭 일정을 잡고 있을 정도다. 시작부터 파업을 염두에 두고 교섭에 임하는 것이다.

노조들은 이렇게 사측을 몰아붙이면서도 평소에는 회사로부터 갖가지 지원을 얻어내고 있다.

예컨대 대형 시중은행 노조위원장들은 지점장급 이상 간부들이 타는 승용차와 운전기사를 제공받는다. 사측은 기사 월급과 기름값 등 차량유지비를 전액 대준다. 노조위원장은 이 차로 출퇴근하고 노조 일도 본다.

두산중공업의 노조 지회장은 회사에서 승용차(매그너스)를 제공받는 것은 물론 공장의 평균 잔업시간만큼의 시간외수당까지 자동 지급받고 있다. 노조는 이를 그저 관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임금투쟁은 여전하다. 임금이 낮아서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대형 화학업체 L사의 경우 경력 25년 안팎의 생산직 연봉이 야근수당을 포함해 9천만원 정도나 된다. 학자금 지원 등 복리후생을 더하면 1억원에 이른다.

한 민간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분규가 일어난 대기업 중에는 노조원 연봉이 4천7백만~5천만원에 이르는 곳이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적어도 대기업의 경우 임금투쟁의 명분은 약하다는 얘기다.

절대적인 임금수준보다는 무조건 나눠갖자는 획일적인 분배의식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에 밀려 기업의 국제 경쟁력은 뒷전이다. 일본무역진흥회(JETRO)에 따르면 아시아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노사문제를 매년 중요 애로사항으로 지적하는 곳은 한국뿐이다.

여기에다 정부가 비정규직 우대 등 우리 경제나 기업 능력에 벅찬 친노동 정책을 자꾸 내놓고 있다고 기업들은 불만이 크다.

외국인 근로자를 구해보려고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를 찾은 한 중소기업 사장은 "도대체 뭘 먹고 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정부의 친노동 성향에 강한 불만을 보였다.

이에 대해 새 정부의 노동정책 브레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새 정부의 노동정책을 주도하는 청와대의 한 고위 정책참모는 "저임금 모델로 성장할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고 했다.

또 친노동 정책에 대해서는 "법을 바꾸고 획일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시행해야 시스템이 굴러간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안에 대해서는 설명이 궁색하다.

그러는 동안 외국기업들의 시선은 차가워지고 있다.

"새 정부가 노조 편향적이라는 인상을 줄 경우 동북아 중심권 구상에 큰 부담이 될 겁니다. 특구법을 만들어도 소용 없습니다. 한국에 들어와 과다한 인건비 탓에 도산하는 곳이 나오면 외국인 투자는 싸늘하게 식습니다."(주한 외국기업 지사장)

한국 경제가 국제화된 만큼 노사 문제는 이제 국내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는 얘기다.

***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김정수 전문기자(경제연구소), 남윤호.김기찬.하현옥 기자(이상 정책사회부).강병철 기자(산업부)

*** 반론 보도문

본지 5월 2일자 13면 '힘받은 노동계 "밀어붙이면 통한다"'제하의 기사에 대해 금속노조 두산중공업 지회 박방주 지회장은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해 왔습니다.

첫째, "툭하면 정부 당국자를 찾아가 회사에 압력을 가해달라고 매달렸다"고 임원이 주장했다고 보도하고 있으나, 노조는 창원지방노동사무소와 부산지방노동청을 각 1회 방문해 '노동부 중재 하에 노사 합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다해 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있다.

둘째, 4월 21일 금속노조의 정기회의에 참석한 사실은 있으나 그 자리에서 3월 12일자 두산중공업 노사 합의와 관련한 사항을 논의한 바 없다.

셋째, 이전부터 회사에서 노조에 승용차를 제공하고 있으나 차량유지비는 노조에서 충당하고 있으며, 지회장은 같은 직급의 관리직과 동일한 수준의 수당을 받고 있고, 노조지회장이 된 이후 추가로 인상된 급여를 받은 사실이 없다.

본지가 시리즈로 게재하는 '지금은 노조시대'와 관련, 지난 5월 2일자 '투쟁이냐 교섭이냐'제하의 기사 중 "평화선언이라도 하고 회사 살리기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사실이 없고, "상급단체에서 징계한다고 해 할 수 없다"는 대답을 한 사실이 없다고 박방주 두산중공업 지회장과 금속노조가 알려왔습니다.

또한 금속노조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덧붙였습니다. 두산중공업 분규시 '무노동 무임금'원칙이 무너졌다고 보도한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회사는 합법 파업 때 적용할 수 없는 무단결근 처리를 불법으로 한 바 있으며, 이에 대해 노사가 합의문에서 파업기간 중에 무단결근 처리로 인해 발생한 순 손실분의 50%를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지난해 6월 두산중공업 분규의 폭력사태 원인은 사측의 용역경비 동원으로 빚어진 우발적 사고였다.

한편 일선 조합원이 중앙교섭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고 보도했으나 지난 4월 30일 대의원대회에서 전 대의원의 79%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중앙교섭을 통과, 대다수의 노조원이 중앙교섭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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