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5)제77화 사각의 혈전 60년-김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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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무패의 신화>
일본 경량급(플라이∼밴텀급)의 왕좌를 5년간이나 차지하고 있던 박촌오낭을 불과 1회1분만에 전격적으로 녹아웃 시킨 서정권은 자기 스스로도 너무 뜻밖의 결과에 잠시 멍청해 있었다. 그러고 곧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림을 알았다.
서정권은 오늘날까지도 이 때의 순간을 자주 얘기한다.
서정권은 통쾌한 KO승의 기쁨보다 도리어 공포감에 휩싸인 것이다. 관객 중 일부 일본인들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사기다』고 소리쳤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정책이 철두철미 기승을 부리고 있던 이 시기에 유독 프로 복싱계라 해서 한국인들의 행세가 자유롭고 일본인들과 대등한 대접을 받을 턱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인 복서들이 대세력을 형성한 30년대 말 이전까지는 일본의 매치메이커들이 흔히 갓 데뷔한 신진의 한국인 선수들을 일본인 최강자들의「동네 북」으로 만들기 일쑤였다.
또 일본 특유의 깡패 조직이 링 주변에도 항상 암약, 한인 선수들을 위협하고 괴롭혔다.
서정권이『식은땀을 흘렸다』고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심리적인 쇼크는 이와 같이 언제나 번뜩이고 있는「사무라이」들의 눈초리와 칼침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인 백촌오낭은 당대의 최고 인기 복서였고 당초 도변 사범이 이 대전을 만든 의도도 웅속이낭 선수의 도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인기선수들을 동원함으로써 입장수입을 올리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정권을 위해, 그의 장래를 염두에 두고 데뷔전을 백촌오낭과 맞서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정권은 재빨리 경기장을 도망치 듯이 빠져 나왔고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당시 링 계에서도 이민족간의 갈등이 감돌고 있었음을 이해케 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경기 다음날 신문들은『서정권의 기적과 같은 KO승』을 대서특필했고 서정권은 일약 유명선수가 되었다.
서정권의 두번째 상대도 역시 톱클래스의 강자 이등용. 이 선수는 1926년에 일본 아마추어 플라이급 챔피언이 된 후 프로로 돌아 백촌오낭에 육박하는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등용은 일본 복싱사상「가장 아름다운 테크닉」을 구사하는 선수로 지목되는 선수다.
서정권은 복싱입문 3개월째 되던 어느 날이 이등용과 도장에서 연습게임을 가져본 적이 있다. 이때 서정권은 이등의 빠르고 교묘한 예공에 실컷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이제 정식 게임에서 입장은 정반대였다. 서정권 특유의 맹렬한 돌격에 이등이 자랑하던 불세출의 테크닉은 그저 살랑거리는 꽃술에 불과했다. 서정권의 6회 판정승.
이로써「조·데이껜」(서정권의 일본 발음)은 부동의 스타덤에 올라섰다.
이후 서정권이 가는 곳엔 승리뿐이었다. 프로 데뷔로부터 꼭 1년 동안 그야말로 서정권의 야무진 자갈펀치는 일본 전역을 석권했다.
27전에 11KO승을 기록했으며 무패의 신화를 창조했다.
일본 프로복싱 사상 27건 전승의 대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
더구나 그 전적은 불과 1년이란 짧은 기간에 수립된 것이다
(지난 60년대 세계 플라이급과 밴텀급 챔피언이었던 일본 최고의 복싱영웅「파이팅」원전은 2년4개월 동안 25연승을 기록했다) .
게다가 아직 체제가 확립되지 못했던 그 당시 서정권이 싸운 상대 중엔 페더급과 라이트급 선수도 있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정권은 2체급이나 위인 청룡도 이용식(식촌룡낭) 이나 미국선수「마이크·루이저」등과무승부를 이룬 적이 있으나 체급이 낮으므로 서정권의 승리로 간주된다.
일본 권투 구락부의 사범 도변용차낭은 서정권의 출현으로 흥행이 잇따라 히트를 치자 이재의 수완과 욕심을 자신이 현역 때 활약했던 미국으로 뻗친다.
일본 안에는 서정권의 적수가 없었기에 새 무대의 개척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변 사범은 원래 미국선수들을 일본에 초청하는 문제를 협의하러 도미하는 길에 서정권을 데리고 갔다.
서정권 외에도 구전금태낭 등 일구 소속 3명의 선수가 동행했는데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너차례 시합을 갖고 돌아올 참이었다.
그러나 32년4월28일 대양구을 타고 요꼬하마항을 출발, 태평양을 건너간 서정권은 미 대륙을 본격적인 활동무대로 삼아 약3년간을 머물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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