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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깊이보기: 흔들리는 한국영화

제작비 급증…관객수는 뚝 '외화내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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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영화계에 먹장구름이 가득하다. 지난주 벌어진 강우석 감독 주연에 최민식.송강호씨 조연의 '충무로 목장의 결투'로 영화계의 구조적 모순이 잠깐 드러났다. 영화제작사와 매니지먼트사가 일단 상호 협력과 이해를 내세워 사태를 봉합했지만 사안에 따라 언제든지 충돌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총체적 위기에 빠진 한국 영화산업의 내막을 분석한다.

◆ 속병 곪아 터진 충무로=최근 불거진 충무로 위기론은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뚱맞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자축하며 '영상 입국론'마저 나왔던 게 엊그제인데 갑자기 영화제작사들이 "이대로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일제히 나섰으니 말이다.

'쉬리'(1998년)에서 불 붙은 한국 영화 열풍은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친구'(2001년)에서 탄력을 받았고 지난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로 정점을 찍었다.

올해도 겉만 보면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 영화 투자.배급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집계한 올 상반기 흥행작 '베스트 5'는 한국 영화가 차지했다. '말아톤'(581만 명), '공공의 적 2'(391만 명), '마파도'(303만 명), '혈의 누'(227만 명), '댄서의 순정'(220만 명) 순이다. 시장점유율도 50%대를 굳게 지키고 있다.

해외에서도 좋은 소식이 들린다. 한국 영화가 비싼 값에 속속 팔리고 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270만 달러), '달콤한 인생'(320만 달러), '태풍'(350만 달러), '괴물'(470만 달러), '형사'(500만 달러) 등이 신기록을 새로 써 가며 일본에 수출됐다. 또 배용준.손예진 주연의 '외출'은 9월 아시아 10개국에서 동시 개봉할 예정이다.

그러나 외화내빈이다. 한국 영화계의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관객 수 감소. CJ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올 상반기 관객은 전국 6904만 명으로 10년 만에 처음으로 줄어들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초대형 히트작이 없었던 요인도 작용했지만 2000년대 이후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였던 관객 수가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건 분명 충격적이다.

▶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강우석(왼쪽 사진)감독과 배우 최민식송강호씨가 지난주 위기에 빠진 충무로의 오늘에 대해 각각 얘기하고 있다. [연합]

수익률 저하는 더욱 심각하다. 특히 영화 생산기지인 투자.제작부문의 수익성이 2002년 이후 계속 악화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2001년 29%를 기록했던 투자.제작 부문의 경상이익률이 2002년 -9.7%, 2003년 -8.8%로 급격히 하락했다고 발표했다. 투자.배급사인 IM픽쳐스도 지난해 한국 영화사들은 총 419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편당 6억원 정도의 손해를 봤다. 2003년 적자 규모는 15억원이었다.

◆ 수익률 하락=수익성 저하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우선 제작비의 급상승이다. 2001년 31억원이었던 평균 제작비는 2002년 36억원(마케팅비 포함), 2003년 45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스타들의 개런티 급등도 한몫했으나 제작 전반의 비용 증가가 수익률 하락을 불렀다.

매출의 절대액이 극장에서 발생하는 기형적 시장구조도 영화산업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다. 한국 영화 매출에서 극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74%(2001년)→75%(2002년)→76%(2003년)로 계속 늘었다. 비디오 시장이 몰락하고, 불법 동영상의 홍수로 DVD 시장이 위축된 가운데 오직 극장만을 보고 영화를 만드는 셈이다. 인터넷.휴대전화(DMB 방송) 등 새로운 창구가 속속 등장했지만 아직 시장 파급력이 미약한 상황.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란 대중문화의 생존 전략은 현재 충무로에선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신용카드.이동통신사 카드를 통한 극장들의 관람료 할인 경쟁도 결국 '자기 살 깎아먹기' 식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서울예대 강한섭 교수는 "2000년대 한국 영화 붐은 착시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영화제작사들이 "스타들의 권력화를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연예기획사에 포문을 연 것은 이런 총체적 난국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제작사들이 가장 눈에 잘 띄는 배우, 매니지먼트사에 '방울'을 단 셈이다. 스타들의 고액 개런티를 일부 내린다고 해도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보다 근본적 요인은 한국만의 독특한 시장 구조다. 일단 한국 영화는 아직도 극장에서 할리우드 영화에 비해 홀대받고 있다. 영화수입사가 극장 수입의 60%를 가져 가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한국 영화사는 50%만 돌려받는다. 영진위는 한국 영화 수익 배분율이 외국 영화처럼 6(영화사) 대 4(극장)로 전환되면 투자.제작 부문의 수익률이 13%가량 나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제2 도약이냐 공멸이냐" 갈림길

그러나 투자.제작.배급.상영 등 일원화한 시스템을 갖춘 CJ엔터테인먼트.쇼박스.롯데 등이 충무로를 지배하고, 또 일선 군소 극장에서도 비율 조정에 난색을 표시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다.

◆ 해결책 모색=영화계의 세 축인 투자사.제작사.매니지먼트사 모두 울상이다. 투자사는 영화업의 '고위험 저수익' 성격을 내세우고, 제작사는 밑지는 장사를 한탄하고, 매니지먼트사는 스타파워를 시장의 필연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요즘 충무로는 돈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영진위 보고서에 따르면 2000~2004년 총 43개 조합에 3956억원의 펀드가 조성됐지만 현재 남은 투자액은 1000억원 남짓. 올 들어 SKT.KTF 등 이동통신사가 콘텐트 확보 차원에서 매니지먼트사업.영상펀드 등에 뛰어들었지만 아직 제작 활성화 차원까진 이르지 못했다.

우선 영화제작가협회는 합리적 제작 시스템을 구축할 작정이다. 일종의 '거품 경비'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99년부터 지난해까지 제작된 한국 영화 384편의 예산.정산 내용을 비교.검토, 감독.배우.스태프 등 분야별 적정 임금도 산정할 계획이다. 역량 있는 배우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연기학교도 세운다.

보람영화사 이주익 대표는 '완성보증보험제도' 도입을 촉구했다. 제작에 들어가는 모든 영화가 보험에 들고, 그 보험사에서 투자.금전에 관한 책임을 지는 한편 영화사는 제작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

문화관광부는 '특수목적회사(SPC)'를 도입하고, 문화산업 전용펀드도 신설할 계획이다. 작품별로 만들어지는 SPC는 투자금액.수익 규모 등을 관리하다 영화가 종영되면 자연 소멸하는 회사로, 영화산업의 투명화가 목적이다.

불법 동영상에 대한 대책도 시급하다. 해적판 영상이 온.오프라인에서 기승을 부리는 한 DVD.이동 멀티미디어 방송(DMB) 같은 부가산업이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김형준 회장은 "충무로는 현재 제2의 도약과 공동 붕괴 양자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호·홍수현 기자

외국은 어떤가

지구촌 영화 제작 환경은 제각각이다. 영화도 각국의 역사와 산업적 경험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스타파워는 충무로에 비견할 게 아니다. 같은 스타라고 해도 개런티 2000만 달러(약 200억원) 클럽에 들어야 '특급' 소리를 듣는다. 톰 크루즈.톰 행크스.멜 깁슨.줄리아 로버츠 등 극소수만이 이 클럽에 들어 있다. '살인의 추억' 송강호씨가 밝힌 5억원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전 세계를 겨냥하는 할리우드와 한국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할리우드는 또 스타의 수익 지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기여한 만큼 돈을 가져 가는 철저한 시장원리다. 다만 한국처럼 스타들이 일정 기획사에 소속돼 '단체 파워'를 과시하는 경우는 적다. 대신 배우와 감독, 작가는 '연예 복덕방'에 해당하는 에이전시를 통해 영화사와 접촉한다. 에이전시의 역량에 따라 몸값이 결정되기도 한다. 스포츠 스타, 인기 소설가도 마찬가지. 변호사.회계사가 운집한 에이전시는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실세다. 감독.배우.작가.스태프, 심지어 스턴트맨까지 직종별 노조를 통해 자기 이익을 챙긴다.

최근 한국에서도 개봉한 '씬시티'의 로버트 로드리게스 감독은 원작 만화가 프랭크 밀러를 공동 감독으로 올리려다 "연출 경험이 없는 사람은 공동 감독을 할 수 없다"는 감독조합의 조항에 걸려 조합을 탈퇴했다. 그만큼 직종별 시스템은 치밀하다. 일례로 배우들의 계약서는 책 한 권 두께다. 스타들이 마시는 생수 종류부터 포스터의 크기까지 미주알고주알 기록한다. 우리처럼 몇 장 안 되는 약식 계약서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폭스.워너 브러더스.컬럼비아.디즈니 등 소위 메이저 스튜디오는 기획.투자.제작.배급을 통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일본은 영화마다 제작위원회를 두고 있다. 대자본이 주로 투자를 맡고 투자자가 수익의 60%를 가져 가는 한국과 달리 영화마다 별도의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한다. 제작.배급.방송사 등 10여 개사가 공동 출자해 특정 영화를 위한 회사를 차리고, 그 회사에서 제작을 총괄한다. 흥행 수익은 투자 비율에 따라 결정하며 영화가 종영되면 그 회사도 문을 닫는다. 일본 스타의 개런티는 대개 2억원 미만이며, 주로 드라마.CF에서 돈을 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