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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미국과 중국, 대국외교의 멋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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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강대국들이 법 없이 세상을 주물렀던 제국주의 시대, 그리고 동서냉전의 시대가 남긴 유물과 숙제들은 아직도 시한폭탄처럼 세계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70억 인류가 살아 숨쉬는 지구촌의 성격은 여러 차원에서 계속 변화돼 왔고 또 변화돼 가고 있다. 그러기에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초강대국으로 인식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 관계에 대한 논의는 더욱 가열되는 것이다.

 ‘패권국가’란 어휘는 ‘승자의 권력’ 또는 ‘무력에 의한 지배’라는 부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지금의 미국이나 중국에 적용하기에는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오늘의 세계에서 미·중 두 강대국이 ‘패권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며, 이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뉴욕타임스의 로저 코언도 그의 칼럼(10월 23일자)에서 미국과 중국은 둘 다 예외주의 국가라고 지칭했다. 사실 이 두 나라는 태생적으로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패권적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국가(nation)인 동시에 이념(idea)이라고 코언은 단언한다. 18세기 후반에 태어난 미국은 근대세계에서 자유의 횃불을 든 기수라고 자처하고 있다. 중국 역시 수천 년에 걸쳐 유라시아대륙의 중원을 차지하며 천하의 질서와 조화를 지탱해온 중화의 터전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모든 예외주의 강대국들이 각자의 위치를 지키려 함에는 끈질기게 전투적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21세기 지구촌은 과거 강대국들만의 힘겨루기 마당으로부터 벗어난 지 이미 오래다. 시장의 세계화, 정보기술의 보편화, 국경을 무시한 채 퍼져나가는 가치관과 문화의 유동성은 지정학적 한계에 묶여 있던 국제관계의 성격을 원천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수동적 방관자의 입장을 넘어 미국과 중국의 힘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처하려 노력하고 있다. 냉전 후 유일 초강대국이던 미국의 다극화시대 적응과정을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면서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정책’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는 것이 대세다. 또한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에선 핵무기 보유를 허용하려는 듯 보이는 반면, 아세안 국가들에는 해로와 영해 문제로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중국의 ‘여유’와 이중적 자세에는 의아심을 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도 오해와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 위험이 있으며 그러한 파탄을 예방하려는 응분의 대응책을 함께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우리는 지적한 바 있다(10월 13일자 칼럼). 이러한 우리의 바람은 미국과 중국이 그들의 대외관계에서 보여준 두 개의 긍정적 특징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첫째, 미국 문화와 중국 문화, 그리고 그들의 대외정책은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념보다는 실용주의와 실증주의를 강조하며 극단주의에 휩쓸리기보다는 자제력을 발휘하는 정책을 꾸준히 지켜왔다. 둘째, 미국과 중국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영토 확장 등 팽창주의 경쟁에 비교적 거리를 두어 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지금의 국제사회는 지난 시대에 보여준 두 강대국의 기본 자세가 이 시대에도 긍정적으로 작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미국과 중국은 1970년대 초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던 외교드라마를 한 번 더 공동연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고 있다. 이미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제적 차원에서 미·중 양국의 상호이익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국제평화의 새 틀을 짜는 데 강대국외교의 포용성과 섬세함을 함께 보여주어야 할 때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노출시킨 유럽 평화체제의 한계나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전개되고 있는 소위 ‘이슬람국가’의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비하면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미·중 관계의 진전 여하에 따라서는 모두의 공동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평화체제 구축의 가능성을 충분히 잉태하고 있다.

 내년으로 70년째를 맞는 한반도의 분단대결구도도 남북한의 대화 노력과 미·중 간의 외교 노력이 선순환적인 보완연계로 작동하면 바로 그러한 아시아 평화체제 건설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모든 관계국들의 외교적 상상력과 결단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동맹국이며 중국의 전략적 동반자임을 자처하는 한국은 미·중 간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소통의 가교임을 인식하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한반도 문제 해결의 시나리오를 완성하려 창의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번 주말 베이징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가 그러한 평화외교 촉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